[역사속의 오늘-5월4일]‘세기의 요정’... 오드리 헵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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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5월4일]‘세기의 요정’... 오드리 헵번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5.04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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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929년 오늘 영화 ‘로마의 휴일’로 세계적인 스타덤에 오른 후, ‘헵번 룩’을 대유행시키며 현재까지도 패션 트렌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오드리 헵번이 출생했다.

그녀는 ‘사브리나’, ‘티파니에서 아침을’ 등의 영화에서 잇달아 성공함으로써 ‘세기의 요정’이라 칭송받았으며 ‘피플(People)’에서 뽑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50인’ 그리고 1997년 영국 잡지 ‘엠파이어(Empire)’에서 ‘역대 최고 영화배우 100명’에 선정되어 영화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겼다.

은퇴 이후 유니세프의 명예 대사로 난민 구호 활동과 남미와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 등 인도주의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여 1993년 아카데미 인도주의 상(Jean Hersholt Humanitarian Award)을 받았다. 

1956년 오드리 헵번의 모습
1956년 오드리 헵번의 모습

▲전쟁의 공포와 기근

헵번은 벨기에 브뤼셀에서 영국계인 아버지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과 네덜란드의 유서 깊은 남작 가문의 딸인 엘라 판 헤임스트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성이 헵번인 이유는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그녀의 아버지가 먼 친척뻘인 헵번을 러스턴 앞에 붙여 헵번-러스턴으로 개명하자 그녀도 따라 개명했으며 1948년 모델과 배우 활동을 시작하면서 성에서 ‘러스트’를 뺐다.

그녀의 아버지는 가족들을 버리고 파시즘 운동에 깊이 참여했기 때문에 헵번은 어머니와 함께 잉글랜드 켄트주의 작은 마을인 엘험(Elham)으로 이주하여 기숙학교에 다니며 발레 수업도 받고 자유로운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어머니 엘라는 그녀를 데리고 친정이 있는 네덜란드로 피신하게 되었고 나치 점령하에서 그녀가 겪은 전쟁의 공포와 굶주림 특히 1944년 마켓 가든 작전 이후 찾아온 네덜란드의 대기근으로 그녀와 가족들은 생활을 연명하기 위해 튤립 알뿌리를 먹고 쓰레기통을 뒤지기까지 했다.

원래 건강하지 못했던 헵번은 이 때문에 심각한 영양실조를 겪으며 빈혈과 부종 등 갖가지 합병증에 시달렸으며 훗날 그녀가 어린이들의 구호에 앞장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한 고통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오드리 헵번은 평생 전쟁 영화는 출연하지 않았다. 후일 출연한 ‘전쟁과 평화’에서도 전투 장면에는 출연하지 않았다.

▲만인의 연인

발레리나로도 제법 유명했으나 키가 너무 커서(170cm) 결국 포기했고 계속된 가난으로 연극과 영화에 단역배우로 출연하며 생활을 이어가던 중 프랑스에서 여성 작가 꼴레트를 만나게 된다.

꼴레트는 자신의 작품 ‘지지’의 뉴욕 공연 주연을 헵번에게 맡겨 대성공을 거두고 이 공연을 본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그녀를 ‘로마의 휴일’ 여주인공으로 캐스팅한다. 이 작품으로 헵번은 청순하고 여린 이미지로 큰 인기를 얻어 1953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아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이후 헵번은 ‘사브리나’ㆍ‘전쟁과 평화’ㆍ‘하오의 연정’ㆍ‘티파니에서 아침을’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으며, 1960년 ‘파계’(The Nun’s Story)와 1965년 ‘샤레이드’(Charade)로 각각 최우수 영국 여배우상을 받았다.

특히 ‘마이 페어 레이디’로 사상 첫 개런티 백만 달러를 받은 스타가 되었고 12년 동안 15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비평과 흥행 모두를 충족시키며 큰 인기를 누렸다. 특히 ‘로마의 휴일’을 통해 선보인 '헵번스타일'의 쇼트커트와 ‘사브리나’를 통해 선보인 맘보바지는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패션 아이콘으로 활약했으며 프랑스 디자이너 지방시와의 만남으로 그녀는 ‘오드리 헵번스타일’이라는 자신만의 패션 세계도 구축해 나갔다.

그러나 어릴 때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진 충격 때문인지 늘 안정적인 가정을 원한 그녀는 배우로서의 명성보다는 한 남자의 아내로 헌신하는 삶을 희구했다. 그녀는 ‘로마의 휴일’로 스타덤에 오른 지 1년 만에 영화배우 멜 퍼러와 전격적으로 결혼했고 그와 이혼 후 정신과 의사인 안드레아 도티와 재혼했으나 13년 만에 다시 이혼했다.

▲국제적인 외교사절

오드리 헵번은 1988년 특별 초대된 마카오의 음악 콘서트에서 자신의 명성이 자선기금 모집에 커다란 도움이 되는 경험을 한 후 그녀가 먼저 유니세프 쪽에 봉사 의사를 전달하자 구호를 위한 기금 모집이 절실했던 유니세프는 그녀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환영하여 그녀를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 임명했다.

에티오피아, 수단, 방글라데시, 베트남 등을 방문하여 아이들을 돌보는 등 인도주의적인 구호 활동에 앞장섰고 구호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각종 인터뷰와 행사를 쫓아다니던 헵번은 1992년 9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소말리아를 방문한 뒤 대장암에 걸린 사실을 발견했고 1993년 1월 20일 사랑하는 가족과 소울 메이트 로버트 월더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오드리 헵번의 정열적이고 진심 어린 구호 활동을 기리기 위해 유니세프와 민간 구호 단체가 함께 제정한 ‘오드리 헵번 평화상’은 수상자에게는 '평화의 비둘기' 핀이 수여되고 '유엔의 친구'라는 칭호가 부여된다. 2004년 1회 수상자로는 여배우 드류 배리모어가 선정된 바 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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