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4월9일]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의 선구 '보들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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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4월9일]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의 선구 '보들레르'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1.04.09 11: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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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821년 4월 9일은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시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가 태어난 날이다.

보들레르
보들레르

그는 24세 때 ‘1845년의 살롱’을 출판해 미술평론가로서 데뷔한 뒤 문예비평·시·단편소설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문단에서 활약했다.

또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번역·소개했으며 만년에 이르기까지 17년간 5권의 뛰어난 번역을 완성했다.

여배우 마리 도브륀, 귀족인 사바티에 부인 등과 교류하며 많은 연애시를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다만 불우한 가정 환경과 방탕한 생활로 인해 개인사는 불행했다고 한다.

1857년 청년시절부터 심혈을 기울여 다듬어 온 시를 정리해 시집 ‘악의 꽃 Les Fleurs du Mal’을 출판했으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벌금과 수록된 시 6편을 삭제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 유년시절

보들레르는 1821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는 환속한 사제이며 아마추어 화가였는데 1827년 보들레르가 6살 때 사망했다.

어린 보들레르를 위해 가족 내에서는 유산 관리 위원회가 결성됐으며, 보들레르는 삶 내내 이로부터 모멸감을 느꼈다고 한다.

남편보다 34살 어렸던 고아출신으로 알려진 보들레르의 어머니 카롤린 뒤페는 이듬해 권위 의식이 몸에 밴 오픽 소령과 결혼한다.

보들레르와 그의 어머니와의 관계는 가깝고도 복잡한 것이었고, 이 관계가 그의 삶 내내 계속됐다.

그는 훗날 "나는 그녀의 고결함 때문에 나의 어머니를 사랑했지요. 나는 조숙한 댄디였습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문학적 감수성을 키운 청소년기

보들레르는 리옹 왕립기숙학교의 학생이 되면서 그는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지내기 시작했으며, 성적이 떨어지면 양부는 그를 집에 오지 못하게 했다.

그는 그 당시를 "탈속의 잔인한 시간에 대한 떨림, …비참하고 버려진 어린시절에 대한 불안, 강압적인 학교친구들에 대한 증오, 그리고 마음의 고독."이라고 표현했다.

14살 때 학급 친구는 "그는 다른 어떤 학생들보다 세련되었으며 독특했지요…우리는 훌륭한 문학 작품에 대한 취향과 공감, 조숙한 사랑으로 서로 묶여있었습니다."라고 회고한다.

후에 그는 파리의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의 기숙생으로 편입했는데, 공부에 대해서는 산만하고, 이따금 성실했으나 게으른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 당시에 전국 경시대회 라틴시 부문에서 장려상을 수상하고 프랑스 시 부문에서 2등상을 수상하는 등 문학에 유별난 재능을 보였다.

바칼로레아 합격 후 파리 법과대학에 등록했으나 그는 이어지는 불규칙적인 생활 속에서 보헤미안 화가들과 작가들을 만나며 예술혼을 키운다.

▲‘악의 꽃’ 필화 사건

보들레르는 1857년 그의 첫 시집이며 가장 유명한 작품인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을 출판했다.

이 시들 중 몇 편이 이미 ‘르뷔 데 되 몽드(Revue des deux Mondes)’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적은 수의 안목 있는 독자들만이 ‘악의 꽃’을 읽었으나 시들의 주제는 큰 이슈가 된다.

다른 작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고 막대하며 예측불허였고, 선망과 정의할 수 없는 두려움과 뒤섞여 있었다고 평가받았다.

이 시집의 주요한 테마인 섹스와 죽음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또한 레즈비언 관계, 성스럽고 불경한 사랑, 변형, 우울, 도시의 붕괴, 사라진 순수성, 삶의 억압성 등의 주제를 다뤘다.

그러나 이 시집은 불건전하다는 이유로 그 시대의 주류 비평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됐다. 보들레르와 그의 출판업자들은 풍기문란죄로 고소당했고, 6편의 시는 이후 브뤼셀의 다른 출판사에서 ‘잔해들 (Les Épaves)’이란 제목으로 다시 출판됐다.

보들레르와 상징주의

1864년 스테판 말라르메와 폴 베를렌은 보들레르를 찬양하는 글을 기고하며 보들레르는 상징주의의 아버지로 추앙받는다.

문학사에서 상징주의란 이전의 낙관주의에 기초한 사조 혹은 사회사상들에 대한 일종의 반발로 태동한 사조다.

즉 사회사상으로서의 사회주의(socialisme), 과학만능주의(scientisme), 실증주의(positivisme)은 상징주의가 행할 ‘모든 가치 전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상징주의는 한편으로 고답파의 유미주의 선언처럼 보이는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의 개념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한 시대를 열었지만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시인 보들레르는 상처받은 자존심과 좌절된 창작욕으로 자살 충동을 느꼈으며, 병마에 시달리다 1867년 세상을 떠났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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