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3월23일]싱가포르의 근대화를 이끈... ‘리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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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3월23일]싱가포르의 근대화를 이끈... ‘리콴유’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3.23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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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2015년 오늘 싱가포르의 국부로 불리며 싱가포르를 동남아 제일의 경제 강국으로 성장시킨 리콴유가 사망했다.

그는 다소 권위주의적인 통치방식으로 가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기도 했지만, 특유의 결단력과 예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행정의 효율성을 기하고 눈부신 경제 번영을 이룩해냈으며 1990년 총리직을 사퇴한 뒤에도 원로 장관과 고문 장관으로 싱가포르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리콴유
리콴유

▲인민행동당 결성

리콴유(李光耀)는 1923년 9월 16일 싱가포르에 정착한 부유한 중국계 가문에서 태어났다. 과거 한국의 언론에서는 리콴유뿐만 아니라 한자 이름을 한국식으로 읽은 이광요라고 하기도 했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그의 아버지 리친쿤은 영어에도 능통하여 리콴유에게 중국어식 이름 콴유뿐만 아니라 해리(Harry)라는 영어식 이름을 붙여줬다. 이 영향으로 리콴유가 처음 배운 언어는 영어였으며, 정치에 입문하고서야 말레이어와 타밀어 그리고 중국어를 습득했다.

싱가포르 최고의 학생들만 입학하는 래플스 중ㆍ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장학생으로 래플스 대학에 진학한 그는 대학 시절 영국령이었던 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의 강력한 억압 정책이 그 당시 혼란했던 싱가포르의 질서 체계를 유지하는 것을 보고 권력과 사회 질서에 관한 경험과 생각을 새로 얻었다.

일본 패전 후 1946년 런던 정경대학교(LSE)에 입학하고 1947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법학과로 옮겨 Double Starred First라는 엄청난 성적으로 졸업했다. 1950년에 동문인 콰걱추(柯玉芝, 1920 - 2010)와 결혼하고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싱가포르로 돌아와 노조와 학생운동에 관련된 소송 일을 맡게 된다.

특히 다양한 인종과 언어, 민족, 문화가 복잡하게 얽힌 싱가포르에서 소송의 합의와 중재를 위해 발로 뛰며 좋은 성과를 얻어낸 그는 1950년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명망 높은 변호사로 알려진다.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비공산주의자인 리콴유는 당시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던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목적으로 1954년 영국 유학파 출신의 인텔리와 노동운동가 중심의 좌익세력이 연합하여 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 PAP)을 결성한다.

이후 불어닥친 반공 바람에 힘입어 리콴유는 당내 우파와 함께 인민행동당을 장악하게 되었고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쳐 1959년 자치의회 의석 51석 중 43석을 차지하면서 싱가포르 자치정부 수반에 올랐다.

그는 신임 총리로 산업화, 슬럼 철거, 국민주택건설, 여성해방, 교육의 확대 등에 역점을 둔 5개년 계획을 추진하였고 1961년 좌익계 파벌들이 PAP에서 탈당하여 바리산 소시 알리스(사회주의 전선)를 결성하자 리콴유는 공산주의 세력과 관계를 단절하여 PAP의 온건 세력이 싱가포르 정치를 지배하게 된다.

▲싱가포르 독립

자원ㆍ인구ㆍ내수 시장이 턱없이 부족한 작은 나라 싱가포르를 새로 창설된 말레이시아 연방에 편입하여 그 활로를 모색하고자 했으나 1964년 중국인들과 말레이인들 사이에 발생한 인종분쟁과 중국계가 다수인 싱가포르가 국가 통합성, 내부 안정에 장애를 초래하고 연방 내의 경제권을 주도하리라 생각한 말레이시아는 1965년 8월 일방적으로 싱가포르를 연방에서 축출했다.

주권국가의 초대 총리가 된 리콴유는 신생국의 물리적인 생존과 인종 간의 화합을 통한 국민적 동질성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국방, 경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싱가포르는 천연자원과 수자원의 공급을 말레이시아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둘러싸인 지리적 특성과 매우 빈약한 국방력을 해결하기 위해 1965년 9월 21일, 유엔에 가입했고, 다른 4개의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1967년 8월 8일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을 창립하여 국제적으로 독립된 나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또한 스위스의 모델을 따라 중립과 비동맹 정책을 선언하였고 영국군의 단계적 철군과 이스라엘 장교단을 불러 군대를 육성했다.

그리고 인재양성에 필요성을 느낀 그는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인재를 키우기 위해 남자들이 고학력 여성을 배우자로 맞도록 권고하고 사회개발부(Social Development Unit, SDU)가 설립되어 고학력의 남녀를 매칭 하는 결혼 정책과 상위 10% 인재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그들의 기준에 맞춰 교육체제를 정비했다.

싱가포르는 외국 자본을 유치하고 노동조합과 경영자 사이에 합의와 효율적인 정책을 통해 원자재를 수입하여 가공품을 되파는 중계무역의 거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 금융업의 중심지로 그리고 세계인들에게 높은 인지도를 지닌 관광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는 1959년 자치정부 수반으로 선출된 이래 1991년 명목상 총리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30년이 넘게 싱가포르를 통치했으며, 퇴임 이후에도 원로 장관(Senior Minister)의 지위를 가지고 싱가포르 정부를 사실상 좌지우지했다.

후임 고촉통(吳作棟) 총리가 퇴임하자 아들 리셴룽(李顯龍)을 총리에 앉혀 부자세습에 성공했으며 리셴룽 총리 시절에는 고촉통이 원로 장관 지위를 물려받고 리콴유는 고문 장관(Minister Mentor)이 되어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다

폐렴으로 2015년 3월 23일 오전 3시 18분 향년 9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생전에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던 그의 장례식은 세계 각국의 전ㆍ현직 수반이 참석한 가운데 3월 29일 국장으로, 싱가포르 국립대학에서 엄수되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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