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1월 19일]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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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1월 19일]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 타계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0.11.19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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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삼성그룹과 CJ그룹, 한솔그룹, 중앙일보을 창업한 이병철(李秉喆, 1909년 2월12일~1987년 11월19일) 회장이 타계한 날이다.

 1938년 삼성상회를 세워 무역업을 시작으로 사업에 나선 그는 1951년 삼성물산을, 1953년에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한 뒤 중공업쪽으로 사세를 확장해 삼성중공업, 삼성물산, 삼성석유화학 등 삼성그룹의 기반을 닦았다.

1964년 5월에는 TBC를, 같은 해 9월 중앙일보를 창설해 방송과 언론에도 진출했으나, 중앙일보는 사돈인 홍진기 일가에게 넘겼다.

1969년에는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해 전자제품의 수출에 성공을 거뒀다.

▲ 학창시절

고 이병철 회장
고 이병철 회장

이병철 회장은 1909년 2월 12일 경상남도 의령에서 아버지 이찬우와 어머니 권재림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인 이찬우는 천석지기의 농토를 소유해 이회장의 집안은 대대로 의령과 진주 지역 일대의 대지주였다.

어려서 할아버지 문산 이홍석이 세운 서당인 문산정에서 천자문, 사서삼경, 논어 등을 수학하고 1919년 3월 한학 수학을 인정받아 진주군 지수면에 있는 지수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1920년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경성의 수송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하고 중동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학습진도가 올라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됐다.

1926년 박팽년의 후손인 박기동의 4녀 박두을과 고향에서 결혼했다. (자서전인 ‘호암자전’에는 1929년에 결혼했다고 밝혔다)

결혼식을 마치고 상경해 다시 학교에 다니며 학업에 열중하다 4학년 1학기 무렵 일본 유학을 결심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옆 동네에 살던 효성그룹의 창업주인 조홍제를 찾아가 사정해 일본 유학 경비 500원을 빌려 조홍제의 도움으로 그와 함께 일본에 유학했다.

1929년에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으나 1학년 때 쉽게 지치고 조금만 책을 읽어도 쉽게 피로해지는 증상이 생기는 등 건강악화로 휴학계를 냈다.

후일 회고에서 그는 "공부해서 무슨 벼슬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도쿄의 신학문이 어떤 것인지도 알았고 그 사람들의 생각도 알게 되었으니 유학생활을 더 하면 뭣하나 싶은 회의가 들었다"며 1931년에 자퇴하고 귀국했다.

▲ 초기 기업활동

1930년대, 대구상회
1930년대, 대구상회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하면서 건강을 회복한 그는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을 굳히고 아버님의 도움으로 고향 인근의 포근 항구 마산에 조선 각지에서 생산한 쌀을 수집하고 도정해 일본으로 보내는 도정공장이 있는 것을 알아내 친구 2명과 힘을 합쳐서 동업으로 정미소를 차렸다.

1936년 고향 친구인 정현용, 박정원과 동업으로 마산에서 도정공장과 협동 정미소를 운영하기 시작했으나 중일전쟁의 여파로 정미소와 자동차 회사 등과 김해의 땅을 모두 팔아 은행 빚을 갚고 빈털터리가 됐다.

그 뒤 1938년 3월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 30,000원(당시 한달월급 약15원)을 자본금으로 대구 수동에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걸고 사업을 시작했다.

1941년 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청과류와 어물 등을 생산자로부터 공급받아 도매, 소매업과 수출 등을 하면서 중국에도 수출을 했다.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하고 광복 후인 1947년에 경성으로 상경해 ‘삼성물산공사’를 창설하고 무역업에도 나섰다.

1950년 초 일본공업시찰단원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어 출국, 일본 내 제조업, 수공업 등 일본의 공업계와 전후 공업시설 복구 현장을 직접 시찰했다.

그해 6월 25일 한국 전쟁을 맞아 피난을 떠났다가 1951년 무렵 부산에서 다시 삼성물산을 세워 다시 무역업에 본격 뛰어들면서 1953년에는 제조업에도 투자했다.

▲ 제조업 활동

1953년 제일제당, 1954년 제일모직을 설립하고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동방생명, 신세계백화점, 안국화재보험, 전주제지 등을 인수하고 성균관대학교 등 교육사업에 도 투자하기도 했다.

이후 중앙개발, 고려병원 등을 인수해 운영했고 1961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경제인연합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1964년초 한국비료를 인수 운영하던 중 그해 5월 동양라디오, 텔레비전 ‘동양방송’을 설립하고 방송에도 진출했다.

1965년 9월 중앙일보를 창설하고 언론사에도 진출했으나 중앙일보 등은 사돈인 홍진기에게 넘겼다.

1966년 5월 24일 삼성에서 경남 울산시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 포대(약 55t)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통이 난다.

부산세관은 그해 6월 1059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천여만 원을 부과한다. 당시 삼성은 한국비료 공장을 짓기 위해 일본 미쓰이사로부터 정부의 지급보증 아래 상업차관 4천여만달러까지 들여왔었다.

사카린 밀수를 지휘했다고 밝힌 이 회장의 장남 이맹희는 1993년 회상록에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들이 적극적으로 감싼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인 밀수”였다고 고백했다.

후일 이병철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정부가 삼성을 죽이려고 한 것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이병철 회장 등이 직접 개입했는지 정부의 재벌 죽이기식 표적수사였는지의 사실관계 확인은 오리무중이다.

▲ 대기업 도약

1966년 사카린 밀수로 물의를 빚게 된 그는 같은 해 11월 한국비료의 상무로 있던 차남 이창희가 서울교도소에 수감되고 1968년 2월에 다시 경영에 복귀했다.

1972년 7월 제일모직 경산공장을 분리하면서 합성섬유를 제조하는 시설을 갖추어 제일합섬을 설립했고 1969년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해 삼성그룹 육성의 주춧돌을 만들었다.

1974년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을 설립하고 중화학 공업에 진출하는 한편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당시 수출위주 경제 성장 정책에 맞추어 전자제품, 화학제품과 중공업 등의 대량 해외수출을 통해 막대한 부를 창출하여 대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삼성정밀·용인자연농원 등을 설립했고 1975년 5월 제일합섬의 공장 시스템을 공개하기도 했다.

제일합섬은 1982년부터 새한그룹을 차려 분가한 차남 창희에게 서서히 넘겨주었고 1977년 5월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합병해 삼성전자로 단일화하고 1984년 8월 상호를 삼성전자 주식회사로 바꾸었다.

▲ 말년

고 이병철회장과 가족들(뒤편 중앙, 고 이건희 회장과 아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고 이병철회장과 가족들(뒤편 중앙, 고 이건희 회장과 맨아래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

1976년에 위암 판정을 받았으나 수술을 받고 이후 삼성정밀 등을 설립하고 1982년 삼성반도체통신을 설립했다.

미술에 심취했던 이회장은 많은 소장품을 수집하거나 소장해 오다가 호암미술관을 건립하고 1977년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 된다.

1987년 11월 초 이병철은 한일경제협회 고문직을 사퇴하고 같은 달 19일 7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묘소는 현재 용인에버랜드에 위치하고 있다.

198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특별 추서와 1995년 제2회 한국경영사학회 창업대상이 추서됐고 일본으로부터 일훈일등서보장이 추서되고 1999년 12월에는 매일경제와 전경련이 주관한 ‘20세기 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의 한사람으로도 선정됐다.

*출처: 위키백과 / 네이버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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