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11월 18일] 독립운동의 불꽃 ‘어윤희 선생’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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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11월 18일] 독립운동의 불꽃 ‘어윤희 선생’ 타계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0.11.18 15: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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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3.1 운동의 주역..
플로렌스나이팅게일기장, 인권옹호 공로표창,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어윤희(1880년 6월 20일 ~ 1961년 11월 18일)는 기독교 전도사, 독립운동가, 사회사업가이다. 본관은 함종 이며 1919년 3.1운동 때 권애라, 신관빈, 심명철 등과 개성 일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운동의 선두에서 활약했다.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으며, 광복 후에는 ‘유린보육원’을 설립하고 사회사업을 진행했다.

어윤희 독립운동가

▲ 생애

그녀는 1880년 충청도 충주에서 한성부 토호 갑부 어약우의 서녀로 출생해 지난날 한때 황해도 해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었다. 이후에는 한성부에서 성장했다. 어려서 한학을 익힌 뒤 1891년에 결혼하였으나, 3일 만에 남편이 동학군에 참여했다가 도적으로 오인 받아 사살되어 어린 나이에 미망인이 되었다. 1912년 개성의 미리흠여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이어갔으며, 졸업 이후에는 전도사로 활동하며, 주로 낙도 주민의 전도와 독립정신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직접 ‘독립선언서’를 개성 일대에 배포해 개성 만세운동의 불씨를 제공하고 거사 당일인 3월 3일에는 권애라, 신관빈, 심명철 등과 함께 1,5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의 선두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교도소 복역 중 3·1운동 1주년을 기념해 재소자들과 함께 다시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무려 3,000여 명의 수감자들이 동참했다. 출옥한 뒤에도 독립운동가 들에게 자금을 제공하고, 육혈포(권총) 탄환을 비밀리에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교도소 복역 당시 어윤희

▲ 사회사업

어윤희는 광복 이후 개성에서 유린보육원을 설립해 고아사업을 하였으며, 6·25전쟁 때에는 부산으로 이동해 가서 10년간 교회 장로로 일하면서 사회사업을 했다. 전쟁 이후에는 서울 마포에 서강 유린보육원을 설립해 운영하다가 1961년 8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1953년 플로렌스나이팅게일기장, 1959년 인권옹호 공로표창을 받았으며, 사후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 개성지역 민족운동 주역

여성으로서 유일하게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배포활동 및 개성지역 3.1운동을 촉발시켰던 3.1운동의 주역이다. 1920년대 어윤희는 독립선언서 배포투쟁을 통해 개성지역의 민족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후 개성여자교육회, 신간회개성지회, 근우회개성지회를 이끌어 가는 핵심인물 이었다. 이에 그녀는 자신의 불우한 환경을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하고 개성지역 민족운동의 지도자적 위치에서 민족문제, 여성문제를 해결하고자 헌신했던 여성독립운동가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위키 백과 / 다음 백과 / 광복회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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