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0월27일]조선 건국한 태조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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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0월27일]조선 건국한 태조 '이성계'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0.10.27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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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 1935년 오늘(음력 10월 11일) 고려 말의 무신으로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출생했다.

그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고려인과 여진족으로 구성된 사병조직을 바탕으로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며 신흥 무인 세력의 선두주자로 중앙 정계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는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후 정도전, 조준 등의 개혁파와 함께 고려 공양왕을 폐하고 조선을 건국했다. 건국 후 국가 제도 전반의 개혁을 단행하여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나, 후계자 선정 문제로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조선 태조 어진
조선 태조 어진

▲신흥세력

정중부와 함께 무인 정변을 일으킨 이의방의 동생 이린은 이성계의 6대 조가 되며, 이린의 손자 이안사(이성계의 4대조)는 일족을 거느리고 전주에서 원나라의 쌍성총관부가 설치된 함경도 동북면 일대로 이주를 하면서 원나라 관직을 받았다.

이후 그의 일가는 원의 관직을 역임하며 세력을 확장하다 아버지 이자춘이 공민왕 때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당시 고려를 도운 공으로 고려의 벼슬을 받는다.

이성계는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1361년 독로강 만호 박의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려 정부의 명령을 받고 출전하여 박의를 살해했으며, 같은 해 홍건적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자 친병 2천 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다.

원나라 황제에 의해 고려왕에 봉해진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쳐들어 온 원군을 최영과 함께 격퇴했으며, 동북면으로 침범한 여진족을 크게 무찔렀다.

또한 내륙까지 침범한 왜구를 크게 물리친 황산대첩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고 이후 이성계는 신흥 무인 세력의 선두주자가 되어 실권을 잡는다.

▲위화도 회군

1388년 수문하시중이 되어 최영과 함께 임견미와 염흥방을 주살하고 최고 실권자가 되었을 무렵 국제 정세는 원나라가 쇠퇴하고 그 자리를 차지한 명나라는 예전의 원나라 땅은 지금은 모두 명나라의 소유라고 주장하며 쌍성총관부 지역에 철령위를 설치했다.

이에 반발한 우왕과 최영은 명나라 초기 불안한 정국을 틈타 요동까지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성계는 최영이 국제 정세를 잘못 판단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4 불가론 (①소(小)로서 대(大)를 거역하는 것 ②농번기인 여름철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 ③요동을 공격하는 사이에 남쪽의 왜구가 침입할 우려 ④여름철이라 비가 자주 내리므로 아교가 녹아 활이 녹고 군사들은 질병을 앓게 될 것)을 들어 요동 정벌에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우왕의 명을 받아 우군 도통사가 되어 좌군 도통사 조민수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요동 정벌 길에 올랐으나, 압록강 하류의 섬인 위화도에서 큰비를 만나 더는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다.

긴 장마로 인해 군사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도망병이 속출하자 결국 이성계는 조민수와 여러 장수들을 설득해 회군을 결정했고, 그 소식은 곧바로 평양에 있던 우왕과 최영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평양에는 반란군에 맞설 병력이 없어 결국 우왕과 최영은 생포되어 유배되었다가 죽임당했다.

위화도 회군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세우는 역성혁명의 시작이었다.

▲조선

개경을 점령한 이성계는 우시중이 되어, 조준을 중심으로 한 개혁파 사류와 연합하여 정도전과 함께 개혁 추진 세력을 확보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했다. 그리고 수시중과 도총중외제군사가 되어 정치ㆍ군사적 실권자의 자리를 굳혔다.

이듬해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뒤 수문하시중이 된 이성계는 1390년 전국의 병권을 장악하고 곧이어 영삼사사 그리고 1391년 삼군도총제사가 된 후 조준의 건의에 따라 전제 개혁을 단행해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고, 1392년 7월 공양왕을 원주로 내쫓고 마침내 새 왕조의 왕위에 올랐다.

태조는 즉위 초에는 국호를 그대로 ‘고려’라 칭하고 의장과 법제도 모두 고려의 고사를 따를 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차츰 새 왕조의 기틀이 잡히자 고려의 체제에서 벗어나려 했다. 

먼저, 명나라에 대해 사대 정책을 쓰면서, 새 왕조의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고, 고려의 기득권층을 배제하고 새로운 지배계층을 형성하기 위해 왕사 무학의 의견에 따라 한양을 새 수도로 삼기로 했다.

태조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한 후 도성을 쌓고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 종묘, 사직, 시장 등을 건설하여 도읍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 정도전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여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를 마련하였고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 등을 편찬케 하여 통치 규범을 확립했다. 

또한 이성계는 작은 나라인 조선의 안정과 당시 국제 정세 속에서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 숭유억불ㆍ농본주의ㆍ사대주의 세 가지의 건국이념을 세우는데 이는 조선 500년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이 되었다.

▲왕자의 난

이성계의 재위 기간은 1392년부터 1398년까지 불과 6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세자 책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첫 번째 부인 한 씨의 소생 이방원과 아내로서 내조한 두 번째 부인 강 씨(신덕왕후)는 서로의 생각이 달랐다.

이방원은 당연히 세자 자리는 공이 큰 자기의 것으로 생각했고 강 씨는 자기 아들 중 하나가 다음 왕이 되기를 희망했다.

또한, 왕권과 신권의 조화로운 정치를 추구하는 정도전은 너무 강한 성격의 이방원이 다음 왕위를 잇는 것은 부담으로 생각되어 강 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추대했다.

이방원은 즉시 자신의 사병을 일으켜 정도전을 급습해 죽이고 이복동생 방석과 방번을 모두 살해했다. 이성계는 이 변란으로 인생무상을 느껴 1398년 9월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2년 뒤 이방원은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넷째 형 방간마저 물리치고,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 조선의 3번째 왕으로 등극한다.

왕위를 둘러싼 자식들의 목숨을 건 권력 다툼에 회의를 느낀 이성계는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고향인 함경도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 이방원은 이성계를 데려오기 위해 매번 차사를 보냈지만, 이성계를 차사를 모두 죽여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생긴 말이 심부름을 간 사람이 소식이 없을 때 쓰는 ‘함흥차사’이다.

이후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간곡한 설득으로 겨우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태상왕의 자리에 있다가 창덕궁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출처: 다음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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