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월 16일] 문학으로 일제와 맞선 ‘이육사 선생’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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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월 16일] 문학으로 일제와 맞선 ‘이육사 선생’ 순국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0.01.16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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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황혼’, ‘청포도’, ‘광야’ 등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총칼 대신 펜으로 일제와 맞선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 선생’의 순국일 이다.

▲ 유년과 수학

이육사 선생
이육사 선생

이육사 선생은 1904년 5월18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에서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의 6형제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호적에 기록된 이름은 원록, 두 번째 이름은 원삼이었고 훗날 활(活)로 개명했다. 자는 태경, 본관은 진성으로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다.

그는 어린 시절 보문의숙이라는 신식학교를 운영했던 할아버지 이중직으로부터 전통 한학을 배웠고 12세 때인 1915년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가세가 기울어지자 가족들과 안동군 녹전면 신평동 듬벌이로 이사했다.

그 후 대구로 이사한 뒤 육사는 서화가로 명성을 떨치던 서병오에게 그림을 배웠다.

17세 때인 1921년 그는 영천 출신 안용락의 딸 안일양과 결혼한 다음 처가에서 가까운 백학학원에서 1년 동안 공부하고 이때 원삼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1923년에는 일본으로 유학 후 1925년 돌아와 서상일이 민족계몽운동을 위해 세운 교육회관 '조양회관'에서 동지 이정기, 조재만 등을 만나 수시로 중국을 드나들며 독립운동을 모색하기도 했다.

▲ 항일운동과 시인 활동

1925년 독립 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한 뒤 일본과 중국을 무대로 항일 활동을 시작한다.

1926년 중국에서 잠시 귀국해 문예운동 창간호에 시 ‘전시(前時)’를 발표하기도 하지만 이 무렵에 발생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3년형을 언도받고 투옥된다.

1929년 11월부터 시작된 광주학생의거가 확산되면서 1930년 1월 중순 대구에서도 동맹휴학사태가 벌어졌고 대구 일대에 일제를 성토하는 격문이 돌았다.

육사는 그해 10월 잡지 별건곤에 ‘대구이육사’란 필명으로 ‘대구사회단체개관’이란 글을, 다음해 1931년 1월 3일 조선일보에 ‘이활’이라는 본명으로 첫 시 ‘말’을 각각 발표했다.

문학활동을 펼치던 이육사는 1932년 중국 난징에서 창설된 군사학교 조선인 항일 군관 훈련반(제6대대)에 입학해 특수부대원 훈련을 받고 이듬해 4월 졸업했다.

이때 중국의 대표적인 작가 루쉰과 교유하며 문학적 자극을 얻고 1930년 4월에는 국내의 대중공론에 ‘3익 12방’이라는 시를 보내 게재하기도 한다.

육사는 1935년부터 본격적으로 신조선에 ‘춘수삼제’·‘황혼’ 등을 발표하고 시작 활동에 나섰다. 이후 ▲신조선 ▲비판(批判) ▲풍림(風林) ▲조광(朝光) ▲문장(文章) ▲인문평론(人文評論) ▲청색지(靑色紙) ▲자오선(子午線) 등에 30여 편의 시와 그밖에 소설, 수필, 문학평론, 일반평문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육사의 대표작은 ▲황혼 ▲청포도(靑葡萄), 문장(1939년 8월) ▲절정(絶頂), 문장(1940년 1월) ▲광야(曠野), 자유신문(1945년12월17일) ▲꽃, 자유신문(1945년12월17일) 등이 있다.

유고를 정리해 펴낸 '육사 시집'
유고를 정리해 펴낸 '육사 시집'

▲ 순국

1941년 2월 이육사는 37세의 늦은 나이에 딸을 얻었으나 기쁨 속에서도 경계하는 심정으로 딸의 이름을 ‘기름지지 말라.’는 뜻의 ‘옥비(沃非)’로 지었다.

그해 4월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겪었고 가을에는 심해진 폐질환 때문에 성모병원에서 병마와 싸워야 했다.

1943년부터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일제는 한국인을 방패막이로 삼기 위해 내선일체를 표방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등 조선인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당시 일제가 일본어를 강요하고 한글 사용을 금지하자 분개한 이육사는 문예지에 한시(漢詩)만 발표하는 결기를 보였다.

그는 충칭과 옌안에 가서 무기를 들여와 일제와 싸우고자 했으나 7월 어머니와 형의 소상을 치르러 일시 귀국했다 동대문경찰서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된다.

이육사 동상
이육사 동상

현지의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갖은 고문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의열단 단원이자 친척이었던 이병희가 수습해 화장했고 연락을 받은 동생 이원창이 유골을 서울로 가져와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이후 1960년에 그의 유해는 고향 원촌의 뒷산으로 이장했다.

이육사는 일제 강점기 활동했던 수많은 문인들 가운데 끝까지 가장 진취적이고 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했던 애국지사의 표상으로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됐다.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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