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2월11일] 대한항공 YS-11기 납북사건
상태바
[역사속의 오늘-12월11일] 대한항공 YS-11기 납북사건
  • 여운민 기자
  • 승인 2019.12.11 12: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은 1969년 12월 11일 대한항공의 NAMC YS-11 여객기가 강릉을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중 북한 공작원에 의해 공중 납치돼 북한 함흥시 인근의 선덕비행장에 강제 착륙된 사건이다.

당시 비행기에는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이 타고 있었다.

송환 협상 결과 승객 39명은 송환됐고 승무원 4명과 승객 8명은 북한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 납치 상황

대한항공 YS-11기
대한항공 YS-11기

그날 강릉에서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NAMC YS-11기가 출발한 지 14분이 지날 무렵 강원도 평창 대관령 일대 상공에서 승객으로 위장한 북한 공작원 조창희에 의해 공중 납치됐다.

북한의 선덕비행장에 강제 착륙된 이 비행기에 대해 북한 평양방송은 사건 발생 후 약 30시간 뒤인 12월 13일 새벽 “조종사 2명의 자진 입북에 의해 북한에 도착했다”고 밝혔다.

당시 판문점에서 유엔의 요청에 의해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회의’가 열렸고 납북된 사람들과 여객기 기체의 송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은 UN군이 개입할 사안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며 거부했다.

정부는 일본 적십자사 및 국제적십자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북한과의 협상을 성사시키려 했지만, 북한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 대한민국 각지에서 북한을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12개국 주요 항공사에서 이 사건에 대해 규탄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송환

납북 경로
납북 경로

1970년 2월 5일 북한은 드디어 납북자들을 송환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북한은 다시 약속을 뒤엎고 승무원 4명과 승객 8명은 송환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는 전원 송환을 요구하며 송환 협상을 벌였으나, 결국 2월 14일 판문점을 통해서 12명을 제외한 39명만 송환받고 사건이 종결됐다.

▲ 수사 결과

북한 방송은 ‘조종사 유병하가 납북을 주도했다’고 밝혔지만 한국 내무부에서 탑승자들의 가정환경과 과거행적 등 주요 신상을 조사한 뒤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수사결과에 따르면 “범인은 승객 중 한명이며 강릉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채현덕이다. 그는 기내에서 승객 조창희와 부조종사 최석만을 현혹해 여객기를 납북시켰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제대로 된 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채 단순히 추정으로 발표한 결과였다.

조중훈 당시 대한항공 사장은 내무부의 수사 결과에 불복하고 12월 15일 기자회견을 통해 ‘부조종사 최석만이 간첩행위를 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으며, 경찰 측의 발표는 증거에 의한 것이 아닌 단순 추리에서 나온 추정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 발표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3개월 후 피랍자 송환이 이뤄지면서 밝혀졌다.

1970년 2월 15일 중앙정보부와 치안국은 송환된 피랍자들에 대한 재조사 결과 고정 간첩이었던 조창희가 ‘한창기’라는 가명을 사용해 대한민국에서의 간첩 활동 후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월북을 계획해 승객으로 비행기 앞쪽 좌석에 앉아 있다가 이륙한 지 약 14분 후 조종사를 위협해 납북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날 발표에서는 당초 범인으로 발표되었던 채현덕은 언급되지 않았으며, 부조종사 최석만이 채현덕에게 포섭되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이 발표 후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은 “이 사건이 간첩 조창희의 단독 범행임이 드러남으로써 그동안 당국이 벌였던 수사나 납북 직후의 발표가 얼마나 졸렬했느냐는 것이 증명되었다”며 내무장관과 수사 책임자들의 문책을 요구하기도 했다.

▲ 사건 이후

납치사건 이후 기내에 항공 보안관이 탑승하고, 조종사는 권총으로 무장하게 됐다.

이 조치 덕분에 1971년 1월 23일 대한항공 소속 포커 27기가 강원도 상공에서 피납될 뻔한 사건이 발생했지만 납북을 피할 수 있었다.

당시 기내에 상주하던 항공 보안관의 기지와 전명세 조종사의 희생으로 납북되지 않고 속초 해변에 불시착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됐다.

이후 1994년 남북갈등이 줄어들어 민항기가 납북될 확률이 줄어들자 항공 보안관 제도는 폐지됐다.

2001년 2월에는 송환되지 못한 승무원 중 한 명이었던 성경희가 제3차 이산가족 방북단으로 평양을 방문한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기도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