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1월20일] 자주의 상징 ‘독립문’ 건립
상태바
[역사속의 오늘-11월20일] 자주의 상징 ‘독립문’ 건립
  • 여운민 기자
  • 승인 2019.11.20 11: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립협회 서재필, 독립 상징 건축물 필요성... 건립성금 모금
2009년 서대문 독립공원 재 조성공사로 일반인 개방
사적 제32호 서울 독립문
사적 제32호 서울 독립문

[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조선 후기의 건축물 ‘서울 독립문’은 청나라 책봉체제에서의 독립을 상징하고자 서재필의 독립협회가 주도, 1896년 11월 착공해 1897년에 완공된 문화재이다.

▲건립 배경

조선 시대에 명의 사신들을 맞이하기 위해 서대문 안에 영은문을 건립하고, 근처에는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을 건립하였다. '영은'은 은혜로운 대국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이며, '모화'는 중국을 흠모한다는 뜻이다. 명에 대한 조선의 관계는 소중화사상으로 이어져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로 교체된 뒤에도 계속 이어졌으나 청나라가 쇄약해 짐에 따라 독립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건립초기 독립문(오른쪽), 헐린 영은문 기초(왼쪽)
건립초기 독립문(오른쪽), 헐린 영은문 기초(왼쪽)

▲추진

독립문 건립은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가 중심이 돼 추진했다.

독립협회는 청나라 책봉체제로부터 독립을 상징키 위해 백성들로부터 ‘독립문 건립 성금’ 모금에 나섰다.

사대의 상징 영은문을 무너트리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역사적인 의미를 더했다.

독립문의 높이는 14.28미터, 폭 11.48미터이다. 약 1,850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된 독립문은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삼아서 만들었다.

현판은 김가진이 썼고, 현판 바로 아래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 ‘오얏꽃’이 장식되어 있다. 앞쪽의 기둥 두 개는 옛날 영은문의 기둥으로서, 철거 후에도 남은 부분이다.

독립문의 기공식 때는 대한제국 고종을 비롯한 황족과 고관들이 모두 참여했다. 이 중 김가진은 삼전도와 병자호란, 정묘호란의 굴욕을 이제서야 깨트렸다며 크게 기뻐했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고 1979년에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본래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미터 정도 이전하였다. 현재 2009년 서대문 독립공원에 재 조성 공사가 완료되면서 독립문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1896년 발행된 독립신문
1896년 발행된 독립신문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창간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창간해 그해 7월 2일, 내부적으로는 민중 스스로 인권과 참정권을 주장하게 하고, 대외적으로는 자주국을 표방했다.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목적으로 독립협회를 창설했다. 협회는 그해 7월 2일 설립 조선과 대한제국의 시민사회단체로 초기에는 사교클럽 형식으로 출발해 민중계몽단체, 근대적인 정치단체 및 근대적인 정당으로 발전했다. 참여자 수가 늘면서 각지의 백성들이 참여하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애국심을 높였다. 이후 학생들에게 토론과 타협을 가르치는 협성회를 산하 기관으로 조직해 이를 후원했다. 고종 환궁을 성사시켰으며,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고, 그 옆에 있던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