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한국의 여행 - 전라남도 강진 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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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한국의 여행 - 전라남도 강진 다산초당
  • 최애영 사진객원기자
  • 승인 2019.07.10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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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산 유적(丁茶山 遺蹟)

전라남도 강진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유배되어 18년간 머문 곳이다.

그중 가장 오랜 기간인 11년 동안 머물며 후진 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가 바로 이곳 다산초당이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01년(순조 원년)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사의재, 고선사 보은산방 등을 거쳐 1808년에 외가(해남윤씨)에서 마련 해 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배가 풀리던 1818년까지 다산은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고 글 읽기와 집필에 몰두하여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심서欽欽新書'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정약용(丁若鏞)은 1808년 봄, 해남 윤씨 집안의 산정(尹博의 山亭)에 놀러 갔다. 아늑하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다산서옥(茶山書屋)은 지난 7년간 전전하던 주막이나 제자의 집에 비 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가까운 백련사(白蓮寺)에 절친한 벗 혜장(惠藏, 1772~1811)이 있었고 다산(茶山)은 그 이름처럼 차나무로 가득했다.정약용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비로소 안정을 찾고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10년 동안 다산(茶山學團)으로 일컬어지는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했다. 초당을 가꾸는데도 정성을 기울여 채마밭을 일구고, 연못을 넓히고, 석가산을 쌓고, 집도 새로 단장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윤씨 집안의 산정은 다산초당으로 거듭났고, 정약용은 스스로 다산초부(茶山樵夫)라고 칭하게 되었다.
정약용(丁若鏞)은 1808년 봄, 해남 윤씨 집안의 산정(尹博의 山亭)에 놀러 갔다. 아늑하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다산서옥(茶山書屋)은 지난 7년간 전전하던 주막이나 제자의 집에 비 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가까운 백련사(白蓮寺)에 절친한 벗 혜장(惠藏, 1772~1811)이 있었고 다산(茶山)은 그 이름처럼 차나무로 가득했다.정약용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비로소 안정을 찾고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10년 동안 다산(茶山學團)으로 일컬어지는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했다. 초당을 가꾸는데도 정성을 기울여 채마밭을 일구고, 연못을 넓히고, 석가산을 쌓고, 집도 새로 단장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윤씨 집안의 산정은 다산초당으로 거듭났고, 정약용은 스스로 다산초부(茶山樵夫)라고 칭하게 되었다.
천일각이라는 이름은 ‘하늘 끝 한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인 것이다. 다산의 유배시절에 없던 건물인데,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 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 강진군에서 세웠다.
천일각이라는 이름은 ‘하늘 끝 한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인 것이다. 다산의 유배시절에 없던 건물인데,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 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 강진군에서 세웠다.
천일각에서 정약용의 마음으로 강진만을 바라보고 있는 관강객.
천일각에서 정약용의 마음으로 강진만을 바라보고 있는 관강객.
천일각.동암에서 천일각에 이르기 전 왼편으로 나 있는 길은 백련사로 가는 길이다. 유배생활 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800여 미터 길에는 야생차 군락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 숲을 만날 수 있다.
천일각.동암에서 천일각에 이르기 전 왼편으로 나 있는 길은 백련사로 가는 길이다. 유배생활 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800여 미터 길에는 야생차 군락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동백 숲을 만날 수 있다.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다산은 원래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조그마한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였다.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다산은 원래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조그마한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였다.
석가산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히 여겼다. 다산은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석가산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히 여겼다. 다산은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초당에 오르면 다산초당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보물인 다산 4경이 있다.초당에 이르는 길은 수백 년 된 소나무 뿌리들이 서로 뒤엉켜 세월의 흔적을 보여 주고 있는데, 시인 정호승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 노래하였다고 한다.
초당에 오르면 다산초당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보물인 다산 4경이 있다.초당에 이르는 길은 수백 년 된 소나무 뿌리들이 서로 뒤엉켜 세월의 흔적을 보여 주고 있는데, 시인 정호승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 노래하였다고 한다.
다산 4경 중 하나인 정석.시간을 거슬러 당시로 가보자. 제자들은 스승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자료 수집, 정리, 정서, 편집 등의 작업을 하고, 다산은 정열적으로 각종 저작을 집필하는 동시에 제자들을 능력별, 수준별로 지도하고 독려한다. 한가할 때면 계곡과 연못을 거닐고 차를 마시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시로 읊는다. 다산초당은 유배객의 쓸쓸한 거처가 아니라 선비가 꿈꾸는 이상적인 공간이자 조선 시대 학술사에서 가장 활기찬 학문의 현장이었다.서각(書閣)에 귀를 기울여 보라. 다산과 제자들이 토론하는 소리가 들릴지 모른다.
다산 4경 중 하나인 정석.시간을 거슬러 당시로 가보자. 제자들은 스승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자료 수집, 정리, 정서, 편집 등의 작업을 하고, 다산은 정열적으로 각종 저작을 집필하는 동시에 제자들을 능력별, 수준별로 지도하고 독려한다. 한가할 때면 계곡과 연못을 거닐고 차를 마시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시로 읊는다. 다산초당은 유배객의 쓸쓸한 거처가 아니라 선비가 꿈꾸는 이상적인 공간이자 조선 시대 학술사에서 가장 활기찬 학문의 현장이었다.서각(書閣)에 귀를 기울여 보라. 다산과 제자들이 토론하는 소리가 들릴지 모른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상.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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