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수 칼럼] 개·돼지...그리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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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수 칼럼] 개·돼지...그리고 1%
  • 이영수 기자
  • 승인 2016.07.1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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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라리 계림(鷄林, 신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倭國)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

이영수 국장
우리나라 충신의 대표적인 인물로 추앙받고 있는 신라의 박제상(朴堤上)은 이러한 말을 남기고 왜왕에게 화형을 당해 죽임을 당했다. 白凡 김구(金九)선생의 백범일지에서도 인용된 이 말은 애국에 대한 충절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박제상은 신라 양산지방의 토호 세력으로 삽량주간(歃良州干)이라는 벼슬을 맡고 있었다.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있는 눌지왕의 동생 복호(卜好)를 구출하라는 눌지왕의 명령을 받은 박제상은 곧바로 고구려로 향했다. 고구려에 도착한 박제상은 당시 고구려 왕이었던 장수왕에게 신임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감언이설로 장수왕에게 아부하며 복호의 신라 귀환을 요청했다. 박제상의 꾀에 속은 장수왕은 아무런 의심 없이 복호의 신라 귀환을 승인했다. 무사히 신라에 귀환한 박제상은 눌지왕의 또 다른 동생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하기 위해 왜국으로 떠나려고 준비를 서둘렀다. 그때 그의 부인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며 간곡하게 만류했지만 박제상은 무심하게 왜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에게는 걱정이 있었다. 고구려와 달리 왜국의 왕을 속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박제상은 마치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쳐 온 것처럼 왜왕을 속였다. 왜왕은 박제상의 말을 믿었다. 그러면서 왜왕은 박제상을 앞세워 신라를 쳐들어 갈 생각을 가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박제상은 왜왕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왜왕의 신임을 얻었다고 판단한 박제상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사흔을 탈출시키는데 성공했다. 뒤늦게 박제상의 꾀를 알아 챈 왜왕은 크게 노했지만, 박제상의 애국심에는 감복했다. 왜왕은 박제상에게 벼슬과 많은 부귀를 보장하며 자신의 신하가 될 것을 요청했다. 이 때 박제상은 “신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버텼다. 분노한 왜왕은 박제상의 발 가죽을 벗겨 갈대를 걷게 하는가 하면 불에 달군 철판 위에 올려놓고 고문했다. 그러면서 “나의 신하가 될 수 없는가”라며 재차 물었다. 그의 대답은 똑같았다. 결국 왜왕은 그를 화형에 처했다. 박제상의 고국, 신라에 남아 무사귀환을 바라던 그의 부인은 왜국을 향해 눈물짓다 망부석이 됐다는 전설도 이때 나왔다.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 “민중은 99%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며 어차피 다 평등할 수 없기 때문에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구의역 스크린 도어 사건을 자기 자식 일처럼 생각하는 건 위선이다”.
이러한 말들을 요약하자면 “어차피 위에 군림하고 있는 사람들이 개·돼지들을 먹여 살리지 않느냐, 사회가 합리적으로 굴러가기 위해 어느 정도의 신분 차이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부 나향욱 전 정책기획관의 말이다. 경악의 수준을 넘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들이다. 고시에 합격해 탄탄대로 길을 걸어온 고위 공직자가 이러한 말을 했다니...
설령 현 사회가 1%가 끌어가는 시대라고 하더라도 공직자의 입에서 차마 나올 수 없는 말이다. 말은 말을 하는 사람의 생각의 표현이다. 말의 한계는 생각의 한계이며, 말한 사람의 세계다. 민중을 개·돼지로 표현한 것은 나 전 정책관의 세계의 한계다.

 박제상은 왜왕이 제시한 벼슬과 부귀를 신라의 개·돼지만도 못하게 멸시했다.
박제상이 일갈한 개·돼지와 고위 공직자가 내뱉은 개·돼지의 차이는 무엇일까. 개·돼지가 돼서라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충절과 국민을 개·돼지로 멸시한 고위 공직자의 생각은 분명 다르다. 국민이 공분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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