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수 칼럼> 정치권의 막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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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수 칼럼> 정치권의 막말
  • 이영수 기자
  • 승인 2015.05.12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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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삼국지에서 비롯된 부유주산(腐儒舌劍)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이 말은 진부한 선비의 혀는 칼이라는 의미다. 다시 말하면 시류를 알지 못하는 고루한 지식인의 독설은 자신을 죽인다는 뜻이다. 이 말의 유래를 알아보자. 

 조조가 한나라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허도에 도읍을 정했을 당시. 공자의 20대 손이면서 현자로 이름을 떨치던 공융(孔融)이 예형(禰衡)을 조조에게 천거한다. 공융은 “예형은 한번 읽은 문장은 모두 기억하며, 한번 들었다 하면 결코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또 그의 본성은 도(道)에 합치하며 묘안은 곧 신령을 안고 있는 듯하다”고 극찬하면서 조조에게 곁에 둘 것을 건의했다. 조조 역시 예형의 뛰어남을 알고 있던 터라 예형을 만나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예형은 “조조는 별로 신통하지 않은 인물”이라며 그와의 만남을 거절했다. 거듭된 공융의 제안으로 예형은 조조를 만나게 됐다. 그 사이 조조는 예형의( 毒舌)을 듣고 불쾌한 상태였다.

 #예형은 조조의 책사로 수많은 인재를 길러낸 순욱을 향해 “쓸 만한 것은 얼굴뿐 초상집 문상과 병든 사람 문병이나 할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예형은 이어 순유에 대해서는 “묘지기 노릇이 알맞은 사람”이라거나, 당대의 명장 허저를 향해서는 “말이나 소를 기를 인물”이라고 폄훼횄다. 또 조조를 도와 위나라를 세운 수많은 장군과 책사들을 향해 거침없이 날선 말들도 내뱉었다. 예형은 “조조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옷을 입었으니 옷걸이요, 밥을 먹으니 밥주머니요, 술을 마시니 술독”이라며 비수를 꽂았다. 자신 이외의 인물들은 모두 하잘 것 없는 존재로 여긴 것이다.

 당연히 조조는 이러한 예형을 반갑게 맞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처벌하기에도 껄끄러웠다. 조조는 꾀를 내 북치는 고수로 소환했지만 예형은 조조 앞에서도 거침없는 독설을 쏟아냈다. 조조는 불쾌했지만 예형을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나라의 지도자가 한낱 선비의 독설에 앙심을 품고 처형한다면, 백성들이 자신을 속 좁은 사람으로 여길 것이라는 우려도 깔려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예형의 독설이 지속되자 형주의 유표에게 예형을 보내도록 명령했다.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통치에 귀찮은 존재가 된다면 곁에 둘 이유가 없었다.

 #예형이 형주에 온다는 말을 듣고 유표는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유표는 예형의 뛰어난 글과 학문은 동경했지만 그의 독설과 돌출행동이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주에 도착한 예형은 유표에게 예를 갖추고 글을 지어 바쳤다. 글을 본 유표는 빼어난 그의 학식과 문장에 반해 “형주에는 예형을 뒤따를 자가 없다”며 극찬했다. 어느 날 많은 문인들이 황제에게 글을 올려 바치기로 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예형도 황제에게 글을 지어 바치겠다고 나섰다. 예형은 다른 문인들이 지은 글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웃으며 모두 쓸모없는 글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조목조목 비난하며 유표를 향해 독설을 퍼부어댔다. 결국 유표는 참다 못 해 예형을 강하에 태수로 있는 황조에게 예형을 보내기로 했다.

 황조는 성질이 급한 편이었지만 예(禮)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까닭에 예형의 독특한 성격을 알면서도 극진하게 그를 맞이했다. 예형 역시 황조에게 글을 올렸다. 예형의 달필에 놀란 황조는 그의 지식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예형은 많은 문무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특유의 독설을 내뿜었다. 그러자 황조는 예형의 막무가내 식 행동을 저지하려 했지만, 그의 광기어린 독설은 멈추지 않았다. 예형은 결국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황조를 향해 던졌다. “당신은 사당(祠堂)의 귀신이다. 그것도 반만 죽은 귀신”이라면서 비들비들 웃어댔다. 이를 참지 못한 황조는 예형을 끌어내 목을 벴다.

 #최근 우리나라 정치권에서 입에 담기 쉽지 않은 독설(?)이 난무하고 있다. ‘공갈(恐喝)’이니 ‘귀태(鬼胎)’ 등과 같은 단어는 물론이고 누구나 알 수 있을 법한 문구도 등장한다. ‘꼬꼬댁 거짓말’, ‘유태인의 히틀러 참배’ 등과 같은 구절도 여과 없이 나오고 있다. 이로 인해 문제의 본질은 사라지고 막말과 독설만 난무하는 정치판으로 변질되고 있다. 논점이 변경된 채 소모적인 말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접하는 많은 국민들이 정치에 피곤함을 느끼고 있다. 아니 정치 혐오에 빠져들고 있다.

 언어철학자 비트게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말은 그 사람의 생각을 표현하는 도구다. 말의 한계는 생각의 한계이며, 그 사람의 우주다” 이는 말로 그 사람의 우주를 알 수 있다는 의미다. 독설과 욕설은 내뱉을 때 묘한 쾌감이 있다. 정치인이 그걸 즐기며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결국 그 독설은 자신의 목을 겨냥해 되돌아 온다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보다 정제된 언어로 품격 있는 정치 현실을 만들 수 없는지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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