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국민연금 수급사례1. 이사 가던 날
icon 국민연금공단남인천
icon 2018-10-17 10:27:51  |   icon 조회: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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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가던 날
<한필수>

이삿짐을 꾸리던 아내가 안방으로 들어가며 훌쩍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딱히 위로해줄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달포 전에는 6층 건물과 토지가 경매로 넘어가고 마지막으로 정 붙여 살던 아파트마저 비워야하기 때문입니다. 경매로 전 재산이 날아갔지만 그렇다고 은행 빚까지 해결된 것은 아니기에 신용불량자로 낙인이 찍히는 날입니다. 며칠 전부터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신용불량자를 써주겠다는 일터는 어디에도 없는터라 무작정 아파트 공사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일당 3만 5,000원을 받는 막일을 시작했습니다. 아침마다 손이 퉁퉁 부어올랐습니다. "한 씨! 그거 노가다 귀신이 들린 거요. 한 두어 달 익숙해지면 다 물러가는 귀신 말이오."

그렇게 7개월을 버텼습니다. 보다 못한 누이들이 화물차를 사서 영업을 하라며 2천800만원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신용불량자의 이름으로는 사업용 차량을 구입할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막내 누이의 명의로 등기 이전 절차를 마치고 영업용 화물차량을 운전했습니다. 어떤 날은 오만원도 벌고 또 어떤 날에는 10만원도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20년 넘게 잘 다니던 직장에 사직서를 내게 된 동기는 너무도 우연이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비교적 큰 밭이 있었는데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매각을 위해 부동산 업체에 내놨습니다. 하루는 건설사 사장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 좋은 땅을 왜 팔려고 하느냐면서 유원지에 있는 땅이니 호텔을 짓자는 제의를 해왔습니다. 사흘이 멀다고 찾아와서는 자식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사업이라면서 그럴싸한 조감도까지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종당에는 4층짜리 숙박시설을 짓기로 결심을 굳히는데 설계변경을 통해 6층으로 늘어나고 부대 시설을 갖춘 호텔을 짓기에 이릅니다. 80%의 공정이 보일 즈음에는 회사에 사직서를 냈습니다.

객실과 양식당, 한식당을 갖춘 일반호텔로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매일이 즐거웠지요. 땅 짚고 헤엄친다더니 사업이 별거 아니다 싶었습니다. 지인들이 보는 앞에서는 표정 관리까지 해야했습니다. 프로농구 선수단이 찾아오고 배구 선수들이 묵으면서 명성을 쌓는가 싶었는데 1997년 11월, 외환위기가 닥칩니다. 갑자기 매출이 떨어지면서 26명의 직원들 봉급도 어려운 처지인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은행의 대출금 이자는 자고 나면 치솟았습니다. 서너 달이면 외환 위기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미련을 떨며 2년을 버티다 결국에는 빚만 떠안은 채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저는 6년 동안이나 고향을 찾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에 살고 있는 큰 누이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시큰둥하게 전화를 받았지요.

"막내야, 큰 누이다. 어디 사업하다 망한 사람이 동생 한 사람이더냐? 왜 고향엔 안 오고 그래, 응", "그냥 바빠서요."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이 어디 있고 고향 없이 자란 사람이 어디 있다고그래, 이 큰 누이가 돈 갚으라고 할까봐 그래?!"

6천만원을 빌려 쓰고 아직 갚지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바쁘다니까요."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누이가 다급히 소리를 지릅니다.
"그래 네 마음 다 안다. 그런데 말이다. 아범아, 이 큰 누이도 오래 못 산다는구나..."

얼마 전 큰 누이가 유방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손이 벌벌 떨려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이의 병환이 나 때문인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회한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밤이 지새도록 윗목에 쪼그리고 앉아 얼마를 울었는지 모릅니다. 다음날 아침 고향을 찾았습니다. 누이는 막내의 손을 덥석 잡고는 "그래 잘왔다. 잘 왔어. 여기가 네 고향이잖니." 살구나무 아래 깔아놓은 멍석 위에 마주 앉았습니다.

"아범아, 이 동네에서 우리 집안을 얼마나 부러워한다고... 큰 오빠는 비행기 조종사인 대령 출신이고 넌 또 방송국 아나운서를 했겠다. 이만한 출세가 어디 쉽다든..." 고향을 다녀오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을 즈음이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연락을 하던 사람이 오늘도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국민연금공단의 직원이었지요. 그때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할수록 웃기는 직원이라고 여겼습니다. 사업에 망해서 이 사회를 원망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돈이 어디 있다고 연금 보험료를 내라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저 선생님, 오늘은 5분만, 아니 3분만 시간을 내 주십시오."
매번 저화를 끊어온 것이 미안해서 건성으로 3분만 들어주기로 했습니다. 직원은 차분했습니다. 1988년 1월부터 13년동안 국민연금 보험료를 냈지만, 지난 2000년부터 보험료를 내지 않고 있어, 만60세가 되면 연금을 30여만원만 받게 되니 앞으로라도 계속 보험료를 납부하여 더 많은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라는 설명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설득은 계속됩니다.

"국민연금은요. 바로 선생님같은 분들이 가입하여야 하는 제도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돈 많은 사람들은 노후가 돼도 그냥 있는 돈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퇴직금도 없고 저축도 여의치 않은 사람이 과연 어떤 돈으로 생활을 할 수 있겠어요. 안 그렇습니까?"
직원의 논리는 정연했습니다. 3분만 통화하겠다고 했으나 15분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날로부터 매월 15만 4000원의 보험료를 냈습니다. 비록 화물 자동차를 운영하고 있지만, 자동이체를 신청했더니 15만여원의 돈이 언제 빠져 나가는지 의식도 못한 채 2012년 9월까지 보험료를 납입했지요.

그리고 그 해 10월부터 연금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설령 부채가 있더라도 국민연금안심통장을 신청하면 압류를 금지하는 제도가 있어 신용불량자도 걱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행스럽게 같은 시기에 법원으로부터 파산신청이 받아들여져 이제는 당당히 제 명의로 통장도 만들고 재산도 취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국민연금 70여만원이 크지 않을지 모르지만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벌써 6년 째 국민연금을 타고 있습니다. 전업주부인 아내도 추납과 동시에 매월 19만8000원의 보험금을 내고 있으니 내후년이 되면 이럭저럭 120만원을 수령하게 되지요. 생각해봅니다. 당시에 끈질기게 전화를 걸어 국민연금의 당위성을 설명하던 직원이 없었더라면, 눈 딱 감고 보험료를 먼저 내던 생활 지혜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닷새가 지나면 지금보다 더 큰 아파트를 장만하여 이사를 갑니다. 그 다음날은 25일이니 국민연금을 받는 날입니다. 어김없이 70여만원이 통장에 찍힐 것입니다.

로이킴의 노래 <봄봄봄>을 흥얼거리며 오늘도 영업용 화물차에 오릅니다.
2018-10-17 10:2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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