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8월3일]‘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안주인‘... 정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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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8월3일]‘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안주인‘... 정정화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8.03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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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 1900년 오늘 중국 생활 27년 동안 자신의 가족은 물론 김구, 이동녕 등 임정 요인과 가족들을 돌보며 임시정부의 살림꾼으로서 임정 요인들이 지속해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한 정정화가 출생했다.

김구로부터 한국의 잔다르크라는 칭송을 받은 그녀는 1930년까지 10여 년간 중국과 국내를 오가면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책과 연락책으로 활동했고 대한 애국부인회 훈련부 주임으로 일하는 등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정정화[출처=국가보훈처]
정정화[출처=국가보훈처]

▲임정 요인들을 보살피다

그녀의 본명은 정묘희(鄭妙喜), 아호는 수당(修堂)으로 서울에서 수원 유수를 지낸 정주영의 2남 4녀 가운데 셋째 딸로 출생했으며 딸을 공부시키지 않은 아버지 밑에서도 천자문, 소학 등을 어깨너머로 익힌 총명한 소녀였다. 

그녀는 11살이 되던 1910년 가을 구한말 개화파 학자인 동농(東農) 김가진의 3남인 김의한과 결혼했다. 남편 김의한은 1914년 매동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운 뒤 1917년부터 중동학교에서 수학하면서 정정화에게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많은 나라가 독립을 얻었으며 우리에게도 독립의 기회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등의 국제 정세를 알려주며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1919년 3·1 운동 후 대동단 총재로 추대된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이 상하이로 망명하자 정정화는 독립운동 투신을 결심하고 1920년 상하이로 망명했다. 당시 임정 법무 총장으로 있던 신규식과 시아버지 김가진의 지시에 따라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1920년 3월 초 국내로 잠입했고, 신규식의 큰 조카인 세브란스 산부인과 의사 신필호의 관사를 거점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한 뒤 상하이로 귀환했다.

1921년 봄 두 번째로 국내에 밀파되어 예산의 친정아버지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여 상하이로 귀환했고 이후 여러 차례 국내에 잠입해 은밀히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해 상하이로 나르는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과 대립으로 임시정부의 위상이 손상되어 국내외 동포들의 재정 지원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정화는 임정 요인들의 수발을 들며 힘든 시기를 함께 보냈다.

1931년 연이어 발생한 ‘만보산 사건’과 ‘만주사변’이 주된 원인이 되어 주변 정세가 변화하여 독립운동 상황은 더욱 악화하였고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점령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인적ㆍ물적 기반에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일부 부일배(附日輩)들이 일제의 힘을 배경으로 중국인들에게 저지른 여러 가지 악행으로 중국의 반한(反韓) 감정이 고조되어 임시정부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1931년 말 김구를 단장으로 임정의 특무 조직으로 한인 애국단이 조직되었다.

한ㆍ중 양민 간의 갈등과 대립은 1932년 1월과 4월 한인 애국 단원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로 일거에 불식되었고, 항일투쟁의 연대 고리가 형성되었으나 이들의 의거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정치적 망명객으로 취급하여 보호해 주던 프랑스 조계 당국의 정치적 입장이 변화하여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즉시 상하이를 떠나라고 통고했다.

▲독립운동 단체에 처음으로 가입하다

1935년 7월 임시정부 폐지론을 제기하는 민족혁명당이 결성되고 이에 대항하여 임시정부 사수를 주장하던 김구, 이동녕, 조성환, 조완구 등이 그해 11월 임시정부의 여당 격인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자 정정화는 여기에 가입한다.

1940년 5월 민족진영의 3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했고, 9월에는 군사조직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그해 10월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단일 지도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당(한국독립당)ㆍ정(임시정부)ㆍ군(한국광복군)의 체제를 갖추었다. 

이때 그녀와 남편 김의한은 한국독립당의 창립 당원으로 활약했으며 같은 해 6월 한국독립당의 여성 조직으로 한국 혁명 여성 동맹이 창립될 때, 간사를 맡아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가 자녀들을 위한 3·1 유치원 교사를 하는 등 항일 민족 독립운동에 열정적으로 헌신했다.

1943년 2월에 여성 차원에서 민족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대한 애국부인회 재건 대회에서 훈련부 주임으로 선출되었고 애국부인회는 국내외 한인 여성의 총단결을 역설하고 각종 매체를 통해 국내외 동포 여성들의 각성과 협력을 촉구하는 한편, 위문 금품을 거두어 일선의 독립군에게 보내기도 했다. 아울러 연합군 측으로부터 인계받은 동포 여성들을 교육하여 독립운동에 참여케 하고, 해외 각지의 한인 여성단체들과 긴밀한 연계를 하면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광복 이후 귀국하여 모든 정치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남편이 납북되고 자신도 부역의 누명을 쓰고 투옥되기도 했다. 이후 은둔 생활을 하다가 1991년 사망하여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고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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