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월29일] 독립운동가 김가진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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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월29일] 독립운동가 김가진 출생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1.01.29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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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진
김가진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846년 음력 1월 29일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며,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던 동농 김가진이 태어난 날이다.

김가진의 자는 덕경(德卿), 본관은 신 안동으로 병자호란 때 강화성에서 순절한 문충공 선원 김상용의 11대손이다.

구한말 조정에 출사한 그는 판사대신 주일공사를 역임하고 갑오개혁때 군국기무처회의원이 되어 내정개혁에 참여했다.

독립협회 창설에 참여하면서는 대한협회회장으로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와 대립했다. 일제강점 후 조선귀족령에 의해 남작작위가 주어졌다.

1919년 의친왕 망명기도사건에 가담했으며 자신 역시 탈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 관직 생활

세도가인 안동 김씨 가문에서 예조판서 김응균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서얼이었기에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1877년 김가진은 서얼들의 관직이었던 규장각 검서관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이후 1883년 인천항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외교업무 관장)이 신설되어 유길준과 함께 주사로 임명됐다.

1884년 갑신정변 후에는 고종과 명성황후 앞에서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나라를 배격, 조선의 자주독립쟁취를 역설한 일이 이홍장에 의해 기록돼 있다.

갑신정변으로 적서 차별이 철폐되자 1886년 늦은 나이에 정시문과 병과로 급제, 홍문관수찬 이 된다.

그는 주진종사관으로 중국 천진에 파견되는가 하면 1887년 5월 주차일본공사관참찬관으로 주일변리대신 민영준을 따라 일본 동경으로 가는 등 외교관으로 입지를 다진다.

당시 조선외교관은 현지 중국대사관에 출두, 자신의 임명을 보고해야 했는데, 김가진은 이를 굴욕으로 여겨 거부하기도 했다.

▲ 개혁과 자주 독립을 위한 활동

갑오경장 이후 김가진은 협판교섭통상사무로 발탁되며 조선정치무대의 중심에 진입한다. 군국기무처회의원으로 내정개혁에 참여했고, 김홍집 내각 정식 출범 시 외부협판에 임명됐다.

1895년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하고 상무회의소 발족, 1896년 1월 건양협회 창립에 가담했으며 1896년 7월, 독립협회 창설에 참여하며 위원으로 선임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조성하는데 기여했고 만민공동회에 가담했다. 독립문 현판석의 ‘독립문’ 글씨를 한자와 한글로 쓴 인물도 바로 김가진이다.

1905년 민영환 등과 함께 을사조약체결에 격렬히 반대했다 실패하자, 이듬해 충남관찰사로 자진 좌천한다. 순종이 즉위한 1907년, 규장각 제학을 마지막으로 김가진은 조정에서 퇴장했다.

1908년 6월 김가진은 대한협회 회장에 취임, 대한민보 발행 등을 통해 국가주권 회수에 나섰으며,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와 대립했다.

▲ 임시정부 활동 동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전협, 최익환 등은 제2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며 비밀조직 대동단을 결성했다.

이 대동단의 총재로 추대된 김가진은 그해 10월 아들 김의한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을 결행했다.

상하이에서 김가진은 임시정부 및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후 대동단은 의친왕 이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망명 도중 중국 안동 (현재의 단동)에서 일제에 발각되어 무산되고 말았다.

1920년 3월에는 총재 명의로 포고문·통고문을 배포했으며, 대동단의 박용만·나창헌·손영직·고광원 등과 공동명의로 갹금권고문을 발표했다.

조선총독부는 그를 회유하고자 상하이에 밀정을 보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 후대에까지 이어진 독립운동

1922년 7월 4일 김가진은 77세를 일기로 상하이에서 순국했으며, 임시정부의 주관 하에 장례가 치러졌다.

아들 김의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28년 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 상해지부에서 활동했으며, 임시정부 본거지를 항저우로 옮길 때 이동녕과 김구 등을 수행했다.

1934년에 애국단을 조직하고, 의열단 계열의 군관학교에도 관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해방 후 한국독립단 대표로 남북협상에 참가하기도 했다.

김가진의 며느리이며 김의한의 아내인 정정화 역시 1920년 상해로 망명, 1946년 귀국하기까지 임정 요인들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다.

한편 김가진은 생전에 한학에 정통했고 서예로도 유명하다. 특히 미불체와 동기창체에 능했다고 알려졌다.

2001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체부동에는 김가진의 집터 표석이 설치됐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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