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4월 29일] 서스펜스 영화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
상태바
[역사속의 오늘-4월 29일] 서스펜스 영화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1.04.29 13: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영국과 미국에서 영화감독과 제작자로 ‘서스펜스 영화의 대가’라 칭송받으며 공포영화를 주로 제작한 ‘알프레드 히치콕(1899년 8월13일~1980년 4월 29일)’이 사망한 날이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죄 없는 사람들이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고 이런 영화는 사소한 실수가 불러일으키는 것을 일깨우게 한다고 평가 받는다.

제작, 각본, 편집, 미술에도 능했던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 ‘현기증’, ‘싸이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이창’, ‘오명’, '레베카' 등이 있다.

▲ 어린시절

알프레드 히치콕
알프레드 히치콕

히치콕은 영국 잉글랜드에서 1899년 농산물 가게를 운영하는 아버지 윌리엄(William)과 어머니 에마(Emma) 사이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0년부터 스탬퍼드힐(Stamford Hill)에 있는 예수회 소속 성 이그나티우스 학교에 다녔고 이 학교의 엄격한 규율과 그에 따른 체벌은 10대 시절의 히치콕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13년 학교를 마친 히치콕이 아직 뚜렷한 진로를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버지 윌리엄이 1914년 신장염으로 사망했고 히치콕은 전신회사에서 기술자로 일하게 됐다.

그는 직업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지만 상관의 도움으로 광고부로 이직 후 영화와 문학에 심취해 영국 탐정소설과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 작품에 매료되었다.

그는 훗날 자신이 공포영화를 만들게 된 것은 에드거 포의 작품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 영화계 입문

그의 첫 작품인 ‘기쁨의 정원(The Pleasure Garden)’과 두 번째 영화 ‘마운틴 이글(The Mountain Eagle)’은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평범한 일상 속에 갑작스럽게 악이 침투한다는 히치콕 특유의 설정을 바탕으로 한 세 번째 영화 ‘하숙인(The Lodger)’에서 자신의 독특한 연출 스타일을 탄생시켰다.

영화 '협박' 포스터
영화 '협박' 포스터

이후 히치콕은 1926년 1월 2일 영화 편집자 앨마 리빌(Alma Reville)과 결혼했고 브리티시 인터내셔널 픽처스에 스카웃됐다.

이 회사에서 만든 첫 번째 영화 ‘링(The Ring)’은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이전의 영화들과는 달리 히치콕과 엘리엇 스태너드가 시나리오를 집필했고 다양한 실험적인 기법을 도입했다.

큰 흥행을 얻지는 못했지만 이후 유성영화의 시대가 열리면서 히치콕은 연극 대본을 원작으로 하는 자신의 영화 ‘협박(Blackmail)’에서 부분적으로 소리를 집어넣어 평가단과 관객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는 영화제작사 측에 연극으로 성공을 거둔 작품을 영화화하려는 경향을 반대했고 본인이 제작한 영화 ‘캠버 경의 여인들(Lord Camber's Ladies)’ 등이 연이어 실패해 브리티시 인터내셔널 픽처스와 결별했다.

이후 고먼트 브리티시 영화사와 재계약 후 자신이 바라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일련의 범죄 스릴러 영화를 제작해 ‘는 비밀을 알고 있다’, ‘39계단’, ‘비밀 첩보원’ 등 영국에서 만든 영화 중 대표작이 이 시기에 발표됐다.

▲ 미국 진출

30년대 후반 미국으로 진출한 히치콕은 1938년 7월 미국의 제작자 마이런 셀즈닉(Myron Selznick)의 동생인 데이비드 O. 셀즈닉과 계약했지만 세세한 부분까지 지시를 내리는 셀즈닉와의 공동 작업은 많은 갈등이 야기됐다.

영화 '레베카' (1939년 포스터)
영화 '레베카' (1939년 포스터)

히치콕은 할리우드에서의 첫 영화인 ‘레베카’를 제작해 아카데미상 작품상과 촬영상을 받으며 성공을 거둔 후 서스펜스 영화 ‘의혹(Suspicion)’, ‘의혹의 그림자’와 코미디 장르 ‘스미스 부부’와 첩보 영화 ‘파괴 공작원’ 등 제작자 측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이후 제작자로부터 독립해 자신의 영화제작사 ‘트랜스애틀랜틱 픽처스’를 만들었다. 첫 칼라 영화 ‘로프(Rope)’는 흥행에 성공 못했지만, 그는 주식과 부동산 투자, 각종 방송과 강의에 출연함으로써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히치콕은 신인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판권을 사들여 영화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을 제작해 좋은 결과를 얻고 이 즈음부터 다수의 그의 대표작들을 발표한다.

일흔을 넘긴 나이인 1972년 그는 다시 메가폰을 잡고 ‘프렌지(Frenzy)’를 발표해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평소 과체중과 음주에 건강 악화로 인해 영화 ‘가족 음모(Family Plot)’를 만든 뒤 은퇴했다.

1980년 4월 16일 미국 영화연구소 시상식에서 한 연설이 그의 공식석상 마지막 모습이 돼 버렸다. 그는 4월 29일 로스앤젤레스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히치콕은 영화 플롯 진행에 특정한 내용이나 인물에 관해 관객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내용상 무언가 중요한 것을 암시하지만 실상은 플롯의 진행에 있어 아무런 관련성도 없거나 중요하지 않은 ‘맥거핀’ 기법을 사용해 관객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했다.

또, 그는 감독 자신이 영화 속 어딘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유명해 그것을 찾는것 또한 한 재미가 됐는데 행인이나 영화 속 신문 기사 등에 등장해 카메오 출연을 했다.

그는 1958년 ‘히치콕 극장 시리즈’로 그해 최고 방송 시리즈로서 골든 글로브상을 받았고 사후에는 1980년 대영 제국 훈장 2등급이 추서됐다.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