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4월 22일] 조선 후기 계몽군주 ‘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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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4월 22일] 조선 후기 계몽군주 ‘영조’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1.04.22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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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1694년 10월 31일~1776년 4월 22일)’가 승하한 날이다.

영조의 성은 이(李), 휘는 금(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이다.

숙종(肅宗)의 넷째 아들로 어머니는 숙빈 최씨(淑嬪 崔氏)이다. 이복 형인 경종이 즉위 후 왕세제에 책봉되어 신임사화 등의 숱한 정치적 위기를 넘긴 후 즉위했다.

탕평정책을 시행해 붕당의 대립을 완화시킨 그는 여러 차례 사치풍조 금단의 조치를 내리는 한편 균역법 시행, 청계천 준설과 신문고 설치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조선의 역대 국왕 가운데 가장 장수(81세 5개월)한 그는 가장 오랜 기간(51년 7개월) 동안 재위 했다.

▲ 즉위 전 

보물 제932호 '영조 어진'
보물 제932호 '영조 어진'

1694년(숙종 20년) 9월 13일, 창덕궁 보경당에서 숙종과 숙빈 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유년 시절 사저에서 지내다 입궁해 1699년(숙종 25년) 12월 24일, 연잉군으로 책봉됐다.

1704년(숙종 30년) 사릉 참봉 서종제의 딸 달성군부인 서씨(정성왕후)와 가례를 올렸고 1719년(숙종 45년)에 소실인 정빈 이씨로부터 첫아들인 경의군(효장세자)을 얻었다.

숙종 당시 왕세자였던 경종은 어머니 희빈 장씨가 노론 세력에 의해 사사되면서 희빈 장씨의 정적인 노론의 압박 속에 불안정한 세자의 지위를 유지했었다.

숙종이 승하한 뒤 즉위한 경종은 후사를 도모하라는 노론의 주청 속에 1721년(경종 1년) 이복 동생인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했다.

연잉군을 지지한 노론과 반대편인 소론은 왕권경쟁에 팽팽한 대립 속에서 있었지만 경종은 큰 입장을 표명하지 않다 ‘목호룡의 고변’이 터지자 환국을 시도했다는 명분으로 노론 세력을 불충과 반역으로 몰아 노론의 4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과 환관 50여명의 가족 등을 사형, 유배시킨다.

연잉군은 1722년(경종 2년)에 김일경 등의 사주를 받은 박상검·문유도 등의 음모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한다.

1724년(경종 4년) 8월 25일, 경종이 갑작스레 병을 앓고 복통과 설사를 반복하다가 승하해 영조가 즉위하지만 경종의 석연치 않은 죽음(독살설)을 두고 이인좌의 난과 나주괘서 사건 등 영조의 재위 기간 내내 정통성과 관련한 아킬레스건으로 남게 된다.

▲ 왕권 강화

보물 제1491호 '연잉군 초상'
보물 제1491호 '연잉군 초상'

1724년(영조 즉위년) 8월 30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 후 그는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을 숙청하는데 앞장섰던 소론의 김일경과 목호룡을 처형한다.

즉위 직후부터 그는 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경종 독살설'과, 그가 숙종의 아들이 아닌 노론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악성 루머에 시달렸다.

치열한 당쟁 속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던 영조는 등극하자마자 소론을 몰아내고 한때 노론 정권을 수립하지만 노론의 독주를 염려해 소론의 일부를 중용한다.

붕당의 폐습을 통감하고 차츰 소론을 등용하여 소론을 전부 역적으로 처형하자는 노론 강경파의 주장을 묵살하다 1727년(영조 3년) 노론의 강경파를 추방하고 노론과 소론을 고르게 등용하는 탕평책을 기본 정책으로 삼아 당쟁의 격화를 막는다.

이때는 노론 ·소론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이른바 쌍거호대(雙擧互對)의 인사정책을 폈으나 점차 능력 위주로 전환해 가면서 왕권을 지지하는 탕평세력을 구축해 갔다

1728년(영조 4년), 경종의 죽음으로 정치적인 기반을 위협받게 된 이인좌, 이유익 등이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임금으로 추대하여 무력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인좌, 이유익 등은 소론 내 강경파인 준소파 및 1701년(숙종 27년) 이후 실각한 남인 내의 강경파를 포섭했다.

충청도 청주성을 거점으로 난을 일으킨 이인좌 등은 근기 지방의 남인이 반란에 호응하면서 경상도와 전라도로 세를 확대했으나 관군에 의해 진압된다. 

▲ 경제·문화·국방 업적

영조는 조선사회를 개혁한 계몽군주로서 가혹한 형벌을 폐지 또는 개정해 민중들이 인권을 존중받도록 했다.

신문고 제도를 부활해 민중들이 억울한 일을 직접 알리게 했고 금주령(禁酒令)을 내려 사치·낭비의 폐습을 교정하고 농업을 장려하여 민생의 안정에 힘썼다.

배고픈 민중들의 실태를 조사해 그들을 구제하고, 민중들이 국방의 의무를 대신해 세금으로 내던 포목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균역법을 제정하여 세제(稅制)의 합리화를 기하는 한편, 민중들의 세금 부담을 크게 줄였다.

일본에 조선 통신사로 갔던 조엄이 고구마를 들여왔는데, 그가 들여온 고구마는 훗날 흉년 때 식량으로 대신할 수 있게 됐다.

영조 자신도 소식(小食), 물자절약등으로 검소하게 살아냄으로써 국가 지도자로서의 모범을 보였다.

북관의 군병에게 조총 훈련을 실시하고 1729년 화차를 제작해 이듬해 수어청에 총의 제작을 명하고 진(鎭)을 설치해 각 보진(堡鎭)의 토성(土城)을 개수하는 등 국방 대책에도 힘썼다.

오가작통법을 부활해 조세 수입을 늘리고, 1756년에는 기로과(노인만 보는 과거)를 신설했다.

학문을 좋아했던 영조는 스스로 서적을 집필하고 인쇄술을 개량해 많은 서적을 간행하고 반포했다.

‘퇴도언행록·육전·소학훈의·속오례의·속대전·무원록(無寃錄)·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누주통의(漏籌通義)·해동악장(海東樂章)·여지도서·동국문헌비고·숙묘보감(肅廟寶鑑)’ 등 많은 서적들을 편찬했고 ‘어제경세문답(御製警世問答)·위장필람(爲將必覽), 악학궤범의 서문은 영조의 자서이다.

또한 유능한 학자를 발굴하여 실학의 학통을 수립하게 하고, 풍속·도의의 교정에도 힘써 사회·산업·문화·예술 등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이룩했다.

영조의 이러한 실용 정책의 영향으로 조선은 이익을 선봉으로 실학이 자라기 시작했고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의 시대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릴 만큼 크게 성장하게 된다.

▲원릉에 안장

1776년(영조 52년), 영조는 1776년 재위 52년만에 경희궁 집경당(集慶堂) 에서 승하한다.

재궁은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현 구리시)의 동구릉의 원릉에 안장되었고 현재의 원릉 자리는 원래 그의 증조부인 효종이 안장되었다가 이장된 자리라서 여러 번 논란이 있었으나 그대로 현재의 원릉 자리에 안장된다.

영조의 능인 원릉(元陵)은 1776년 7월 27일 조성되었고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와 함께 안장되어 있다.

능묘의 위치는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에 있으며, 동구릉의 하나로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조는 1757년,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정성왕후의 능을 아버지인 숙종의 명릉(明陵) 근처에 만들고 훗날 자신이 정성왕후의 옆에 묻히기 위해 옆자리를 비워놓았으나 영조가 승하한 뒤 손자인 정조는 당시 왕대비였던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를 의식해 현재의 동구릉 위치에 영조와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을 조성했다.

영조의 원릉
영조의 원릉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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