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3월 18일]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신홍식 목사’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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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3월 18일]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신홍식 목사’ 타계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1.03.18 1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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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일제 강점기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한명으로 기독교조선감리회를 탄생시킨 '신홍식 목사'가 타계한 날이다.

신 목사의 본관은 고령이고 호는 동오(東吾)이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아버지, 국부로 예우 받는 예관 '신규식' 선생의 친족 동생이며 단재 신채호 선생은 그의 친족 조카이다.

▲ 생애

독립운동가 '신홍식 목사'
'신홍식 목사'

신 목사는 1872년 3월 1일 충청북도 청주에서 출생해 유년기 시절 한학을 익혔고 1906년 11월 W.C 스웨러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독교 감리회에 정식으로 입교한다.

1913년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 공주에서 포교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17년 평양남산현교회(平壤南山峴敎會) 전임 목사을 맡아 포교활동과 교육사업을 병행했다.

이후 1919년 2월 14일 기독교 북감리파 목사로 평양의 기홀병원에서 이인환으로부터 3·1독립만세 운동계획을 듣고 서울로 올라와 참여한다.

1919년 2월 20일에는 이인환의 집에서 오화영 등과 함께 모여 서울과 각 지방에 동지를 모아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협의하고 이인환, 이필주(李弼柱) 등과 함께 기독교측 대표 16명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한다.

28일에는 재동 손병희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협의를 한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의 태화관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여해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자진 체포된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1년 2월 마포 공덕동 경성감옥으로 이감된다.

그의 회고를 보면 감옥에서 하루에 세번씩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는데 어느 날은 감옥 안에서 영적 재판을 받는 신비로운 종교 체험을 했다고 밝혔다.

1921년 11월 4일 경성 감옥에서 만기 출옥 후 평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남산현교회 교인들로부터 환대를 받고 이후에도 중국에서 찾아온 신규식 선생의 동제사 독립투사 요원들에 은신처와 연락소 역할을 했다.

또, 친족 형인 신정식 등을 통해 알게 된 항일 및 공화주의 독립혁명에 관한 종교인 대표들에게 동참을 주도했다.

▲ 목회 활동

인천 내리교회
인천 내리교회

1922년 초 인천 내리교회 제9대 담임 목사로 부임하고 1927년에는 기독신보에 ‘신통여행’이라는 동화를 연재하고 ‘금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29년에는 기독교계가 전개한 절제운동에 참여해 저서 ‘장수옹’을 출간한다.

이 책에서 자신의 방탕했던 과거를 적나라하게 밝히고 그는 “술과 여색에 탐닉하는 것이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 망칠 수 있는지”를 상세하게 묘사했다.

또한 청년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그는 설교를 통해 기독교 청년들이 함정에 빠진 민족과 혼돈에 빠진 교회를 위해 나설 때라고 호소한다.

감리교회 청년공동체인 ‘엡윗청년회’와 교계 매체인 기독신보를 통해 청년운동을 전개했고 인천 내리교회, 횡성 등지에 청년회를 조직하고 야학과 주일학교를 열게 했다.

이외에 ‘농무회(農務會)’를 조직해 문맹퇴치와 농촌계몽운동을 펴기도 했다.

이후 1935년 원주읍교회에서 은퇴를 발표하고 원주에서 지내다 1937년 고향 청주로 낙향한다.

노년에 신경질환에 걸려 혼수상태에 빠지는 등 병마에 시달리다 1939년 3월 18일 충청북도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에서 향년 68세로 사망했다.

그는 “하나님을 잘 믿고 충성하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정부는 사후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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