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8월20일] 한국의 아방가르드 문학가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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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8월20일] 한국의 아방가르드 문학가 ‘이상’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1.08.20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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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이상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910년 8월 20일은 일제 강점기의 시인이자 작가, 소설가, 수필가이자 건축가인 이상이 태어난 날이다.

‘오감도’ 등 난해한 시로 잘 알려진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근대 작가이자 아방가르드 문학가로 오늘날 평가받고 있다.

그의 본명은 김해경이며 본관이 강릉 김씨다. 이상이라는 필명은 그가 졸업기념 사진첩에 본명 대신 쓴 별명이기도 하다.

필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화가 구본웅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화구상자에서 연유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때 받은 화구상자가 오얏나무로 만들어진 상자였기 때문에 이상은 '오얏나무 상자'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 출생과 학창시절

경성부 북부 순화방 반정동 4통 6호에서 부친 김영창과 모친 박세창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영창은 일본 강점 전 구한말 당시 궁내부 활판소에서 일하다 손가락이 절단된 뒤 일을 그만두고 집 근처에 이발관을 개업, 가계를 꾸렸다.

백부 김연필은 본처 사이에 소생이 없던 차에 조카인 이상을 데려다 친자식처럼 키우고 학업을 도왔으며, 1917년 여덟 살 되던 해 이상은 누상동의 신명학교에 입학했다.

1921년 신명학교를 졸업한 뒤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경영한 동광학교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동광학교가 보통학교와 합병되자 보성고보에 편입했다.

어린 시절 미술에 관심을 가지면서, 구본웅과 학교 동기로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1926년 3월 경성 동숭동의 관립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부에 입학해 3년 만에 수석 졸업했다.

▲ 건축가 활동 및 등단

졸업 후 이상은 학교의 추천으로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발령을 받았다가 곧 조선총독부 관방회계과 영선계로 자리를 옮겼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 건축기술자를 축으로 1922년 3월 결성된 조선건축회에 정회원으로 가입했고 1930년 조선건축회 잡지 《조선》 국문판에 데뷔작이자 유일한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연재하면서 등단했다.

1931년 6월,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양화 〈자상〉이 입선하고, 《조선과 건축》에 일본어로 쓴 시 〈이상한가역반응〉 등 20여편을 세 차례에 걸쳐 발표했다.

이듬해에는 〈건축무한육면각체〉 제하에 일본어 시 〈AU MAGASIN DE NOUVEAUTES〉, 〈출판법〉 등을 내놓았다.

그밖에 《조선》에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비구(比久)라는 필명으로 내는가 하면 단편소설 〈휴업과 사정〉을 보산(甫山) 필명으로 잇달아 내놓는 등 문학가로서의 활동을 이어간다.

▲ 폐결핵 투병으로 인한 방랑

1931년 이상은 폐결핵 감염 사실을 진단받았고 병의 증세는 점차 악화됐다. 1933년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되자 기수직에서 물러앉고 봄에 황해도 배천 온천에서 요양했다.

이곳에서 그는 단편 ‘날개’의 모델이기도 한 금홍을 서울로 불러올려 종로 1가에 다방 제비를 개업하며 동거했다.

같은 해 문학단체 구인회의 핵심 동인인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박태원 등과 교유를 트고 정지용의 주선을 통해 잡지 《가톨닉청년》에 〈꽃나무〉, 〈이런 시〉 등을 국문으로 발표했다.

이듬해 이태준의 도움으로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지만, 15편을 발표한 후 너무도 난해한 표현이 독자들의 항의와 비난에 시달리자 스스로 연재를 중단했다.

화가로서의 활동도 이어졌다. 박태원의 소설 작품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하융(河戎)이라는 아호로 삽화를 그렸다.

하지만 생활고가 이어지자 다방 제비를 경영난으로 폐업하고 금홍과 결별한다. 인사동의 카페 쓰루(鶴)와 다방 69를 개업 양도하고 명동에서 다방 무기[參]를 경영하다 문을 닫은 후 성천, 인천 등지를 떠돌았다.

▲ 만년의 이상

1936년 구본웅의 알선으로 창문사에 근무하면서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 창간호를 편집 발간해 단편소설 〈지주회시〉, 〈날개〉를 발표하면서 평단의 관심을 받았다.

변동림과 결혼해 경성 황금정에서 신혼살림을 차린 이상은 아내를 두고 새로운 문학 세계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

동경에서는 삼사문학의 동인 신백수, 이시우, 정현웅, 조풍연 등을 자주 만나 문학을 토론했고 단편소설 〈동해〉, 〈종생기〉를 발표했다.

1937년 2월 사상 혐의로 동경 니시간다 경찰서에서 피검돼 조사를 받던 중 폐결핵 악화로 보석으로 출감, 제국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출감 후에도 병세는 더욱 나빠졌고 같은 해 4월 17일 이상은 2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동료 문인이자 친구인 박태원은 이상에 대해서 "그는 그렇게 계집을 사랑하고 술을 사랑하고 벗을 사랑하고 또 문학을 사랑하였으면서도 그것의 절반도 제 몸을 사랑하지는 않았다"면서 "이상의 이번 죽음은 이름을 병사에 빌었을 뿐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역시 일종의 자살이 아니었든가 - 그러한 의혹이 농후하여진다"라는 말을 남겼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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