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8월 19일] 조의제문의 ‘김종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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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8월 19일] 조의제문의 ‘김종직’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1.08.19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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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림파 정계진출 기반 다져
무오사화 발생 계기

[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조선의 문신이자 정치가, 교육자, 시인으로 도승지 형조판서 지중추부사를 지낸 성리학자 ‘김종직(1431년 6월 ~ 1492년 8월19일)’이 사망한 날이다.

자(字)는 계온(季溫)·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 일명 일선)이다.

세조 때에 동료들과 함께 관직에 진출해 세조~성종 연간에 동료, 후배 사림파들을 발탁하고 사림파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져놓았다.

그가 쓴 ‘조의제문’으로 ‘무오사화’가 발생하는 계기가 되어 그는 사후 ‘부관참시’를 당하는 사건으로 영남 사림파의 영수가 됐다.

▲ 암기 신동

점필재 '김종직' 영정
점필재 '김종직' 영정

점필재 김종직은 1431년(세종 14년) 6월 외가가 있는 경상남도 밀양 부북면 제대리 한골마을에서 성균관사예를 지내고 사후 증 호조판서에 추증된 강호 김숙자와 밀양박씨의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아버지 강호 김숙자는 경상남도 고령과 개령, 성주 등지에서 수령과 교수직을 역임했고 밀양에 거주하던 박홍신의 사위가 되면서 밀양에 정착했다.

김종직은 일찍부터 총명해 암기에 능했고 15세에 이미 시문에 암기에 탁월하여 많은 문장을 지었고 일찍부터 시(詩)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어 수만 마디의 말을 기억하는 등 약관이 되기도 전에 신동이라 알려졌다.

▲ 영남 사림파와 ‘조의제문’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해 출사하고 성종 초에 경연관·함양군수·참교·선산부사를 거쳤고 이후 승정원 도승지·이조 참판·동지 경연사·한성부 판윤·공조 참판·형조 판서·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세조이후 사림파에 성리학을 바탕으로 조정에 본격적으로 출사한 것이 김종직과 그의 동료, 제자였다.

그 바탕으로 점필재 김종직을 사림파의 실질적인 ‘중시조’로 평가한다.

정여창, 최부, 김굉필, 이목, 권경유, 김안국, 김정국, 김일손 등이 그의 제자였고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로서 그의 손제자였다.

남효온과 남곤, 송석충, 김전, 이심원은 그의 문하생으로 그는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고 이를 항우의 초회왕 살해에 비유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기록에 남겼다.

후일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은유와 화려한 문장 속에 숨겨진 뜻을 연산군의 명을 받은 유자광이 풀이해 이에 진노한 연산군에 의해 김종직의 제자들이 모두 사형이나 유배를 갔고 이미 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시’ 당한다.

▲ ‘무오사화’

무오사화로 인해 김종직이 관에서 다시 끄집어내어져 온몸이 찢기는 형벌을 당한 사건은 그를 영남 사림의 영수로 추앙하도록 만들었다.

중종 재위 당시 정치개혁을 이끌다 기묘사화로 죽음을 당한 조광조(趙光祖)와의 관계 또한 김종직의 이름을 사림파를 이끈 인물들의 계보에 올릴 수 있도록 했다.

조선 후기 사림파는 자신들의 뿌리를 조광조로부터 찾곤 하였는데, 조광조는 바로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김종직에 대한 상반된 평가도 존재하는데 이황(李滉)과 같은 인물들은 김종직을 단지 글 쓰는 데에 재주를 가진 문사(文士)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송시열이 인정하듯 김종직은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학통을 김굉필, 조광조 등에게 이어주는 공헌을 해 역할을 했다.

비록 그의 행적 자체가 온전히 도학자의 그것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훗날 조선의 전성기를 이끈 성리학자들이 스스로 구축해나간 정체성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했다고 평가 받는다.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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