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8월17일]월간 ‘사상계‘를 창간한 '장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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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8월17일]월간 ‘사상계‘를 창간한 '장준하'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8.17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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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975년 오늘 김구의 비서, 비상 국민회의 서기 등을 역임하고 월간 ‘사상계’를 발행하여, 자유ㆍ민주ㆍ통일ㆍ반독재 투쟁에 헌신한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박정희 정권에 의한 타살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된 그의 죽음은 2012년 8월 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타살을 짐작하게 하는 두개골 함몰 흔적이 발견되어 그의 사망 원인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목사를 꿈꾼 광복군 장교

장준하는 191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장로교 목사인 장석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대관 보통 학교를 마치고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서 1년을 공부한 후 교사였던 부친의 근무지인 신성중학교로 전학했다.

진학 예정이던 숭실전문학교가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되자 1938년 정주에 있는 신안소학교에서 교사로 3년간 근무하며 학교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목사가 되기 위해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가 1941년 도요대학 철학과 예과를 거쳐 장로교 계통인 일본 신학교를 입학했는데 당시 일본 신학교에는 문익환, 전택부, 김익준 등이 같이 수학하고 있었다.

1944년 일본군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그해 2월 중국 쑤저우 지구에 배치되었으나 6개월 만에 홍석훈, 윤경빈과 함께 부대를 탈출하여 중국군에 합류했다. 이후 평생의 동지가 되는 김준엽의 도움으로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에 입대하여 기초적인 제식훈련을 받으면서 잡지 ‘등불’을 발간했다.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의 부실한 훈련에 한계를 느낀 장준하는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기로 계획하고 53명의 동지와 함께 파촉령의 험준한 겨울 산을 넘어 1945년 1월 30일 임시정부에 도착하여 김구를 만났다.

1945년 4월 한국광복군 제2 지대 이범석 휘하의 장교로 근무했고 한국으로 잠입하기 위해 비밀리에 진행된 미국 OSS대원으로 자원하여 특수 게릴라 훈련을 받은 그는 그해 8월 18일 연합군 군사 사절단의 일원으로 이범석, 김준엽, 노능서와 함께 미군기를 타고 여의도에 착륙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거부로 하루 만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고 이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미군 수송기 편으로 귀국하여 김구의 수행비서로 활동했다.

이후 이범석의 권유로 김구가 당수로 있는 한국독립당을 떠나 조선민족청년단에 가입하여 교무처장이 되었으나 이범석은 이승만 측의 인물로 정치적 입장을 달리했고 정권쟁취를 위한 독단에 환멸을 느껴 곧 그만뒀다.

▲자유와 반독재 투쟁

한국전쟁 중인 1952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문교부 장관 백낙준의 추천으로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 연구원에 소속되어 종합교양지 ‘사상’을 창간했지만, 이기붕과 박마리아의 방해로 폐간되자 1953년 장준하가 인수하여 ‘사상계’라는 제호로 발행함으로써 본격적인 종합교양지로 출발하게 되었다.

‘사상계’는 ①민족통일문제 ②민주 사상의 함양 ③경제발전 ④새로운 문화창조 ⑤민족적 자존심의 양성을 편집의 기본 방향으로 하고 이승만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는 데 앞장서 국내 지식인들에게 영향력이 높은 잡지로 성장했다. 또한, 제3공화국 아래에서 자유 언론투쟁에 앞장섬으로써 발행인 장준하는 1962년 한국인 최초의 막사이사이(Magsaysay) 언론문화 부문 상을 받는다. 

그러나 재정난이 계속되는 와중에 1970년 5월호에 김지하의 시 ‘오적’을 게재한 것을 이유로 당국으로부터 폐간 처분을 받았으나 ‘사상계’는 신인문학상과 동인문학상 등을 제정하여 학계ㆍ문화계에 많은 문필가를 배출한 공적을 남겼다.

장준하는 1966년 '국가원수 모독죄'로 구속되어 3개월간 징역 생활을 했으며, 1967년에 4자 회담을 주선하여 야당 통합을 이루어냈고 서울 동대문을구에서 신민당 공천으로 옥중 출마해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1년 신민당을 탈당하고 1973년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하여 최고위원이 된 장준하는 1974년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형 집행 정지로 가석방되는 등 연이은 민주화운동 참가로 10여 차례 투옥되었다.

유신정권에 맞서 1974년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운동본부의 이름으로 발표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대통령 자신이 개헌을 발의해서 완전한 민주헌법을 만들고 그 헌법에 따라 자신의 거취를 정할 것과 긴급조치로 구속된 민주인사와 학생을 무조건 즉시 석방하고 자유 언론을 보장하라고 주장했다.

1975년 범민주세력의 구심점이 된 장준하는 경기 포천시 소재 약사봉에서 의문의 추락사고로 사망했으며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그의 사망 경위를 조사했다.

정부에서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1999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으며 저서로는 그가 일본군에 들어간 1944년부터 해방 후 다시 귀국하여 김구 선생의 일을 보좌하던 1945년 말까지 약 2년에 걸친 항일 대장정의 이야기를 수기로 기록한 ‘돌베개’(1971)가 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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