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7월30일] ‘한무제’...중국 가장 위대한 황제 중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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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7월30일] ‘한무제’...중국 가장 위대한 황제 중 1인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1.07.30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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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무제
전한 무제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기원전 156년 7월 30일은 '한무제'로 잘 알려진 전한의 7대 황제 한 세종 효무황제 유철(漢 世宗 孝武皇帝 劉徹)이 태어난 날이다.

아명은 체, 자는 통(通)으로 알려진 그는 선왕 경제의 11번째 아들이며 효경왕후 왕씨의 소생이다.

기원전 141년~기원전 87년까지 재위한 무제는 유학을 바탕으로 국가를 다스렸으며, 해외 원정을 통해 흉노를 크게 무찔렀다.

이어 남월, 위만조선을 멸망시켜 요동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했으며, 한족 역사상 두 번째로 넓은 영토를 확보해 전한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는 진 시황제·당 태종·영락제·강희제와 더불어 중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 황권을 강화시킨 16세의 무제

그는 16세 때 부황 경제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올랐으며, 유학자 동중서 의견 수렴하여 유학을 국가의 이념이자 학문으로 삼아 다스렸다.

한편 이복 형제와 귀족을 제거하여 황제권을 강화시켰는데, 즉위 전 이복형제들을 물리치고 제위에 오르게 된다.

강력한 경쟁자이며 제위 계승의 라이벌로 지목되던 중산정왕 유승을 계속 의심했는데, 유승은 경제의 서자이자 무제의 이복형이었다.

유승은 이 의심을 피하고자 일부러 주색에 탐닉하는 모습을 보여 한무제의 칼날을 피해갔다.

또한 즉위 후 전대의 권신들과 외척들을 숙청, 면직시키고 실력과 능력으로 어질고 겸손한 인재를 채용하여 관료의 자질을 향상시켰다.

▲ 정벌 사업

장건을 대월지국(大月氏國)으로 파견하고, 장군 위청, 곽거병, 이광 등에게 흉노를 토벌시켜 흉노족 선우를 사살하고 다수 흉노족을 포로로 잡아왔다.

기원전 119년에는 위청을 시켜 흉노를 몽골로 내쫓고 오르도스 지방을 회복, 2군을 두었다. 흉노 혼야왕이 항복하자 무위·장액·주천·돈황 4군을 두어 중앙아시아와의 교통로를 확보했다.

서역 제국의 입공이 계속됐으나, 기원전 104년에는 이광리(李廣利)에게 명해 파미르 고원 북서에 있는 대완국(大宛國:페르가나)을 정벌하게 했다.

남방으로는 푸젠성에 있던 민월과 동월 두 왕국을 병탄·흡수하고, 기원전 111년에는 남월국을 멸망시켜 9군을, 쓰촨성 변경에서 윈난·구이저우 방면에 이르는 염(冉)·방(駹)·수(嶲)·작(莋)·야랑(夜郞)·전(滇) 등의 종족을 귀순시켜, 그곳에 6군을 두었다.

기원전 112년부터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진국(辰國)과의 직접 교역을 반대하고 한나라에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는 고조선으로의 침략을 단행한다.

무제는 기원전 108년 왕검성을 함락시키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요동지역에 낙랑·임둔·진번·현도의 한사군을 설치했다.

▲ 평가가 갈리는 내치

활발한 정복 전쟁으로 한 무제는 재정이 궁핍한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소금과 철과 황, 술의 전매제를 시행하여 경제적 재력 확충을 시도했다.

토지분배 정책에서는 둔전제를 강력히 시행·추진하였고, 둔전제의 일부를 개정하여 정복한 북방지역에 주민의 이주를 적극 장려하면서 북방으로 이주한 백성에게 땅을 나누어 주는 제도를 실시했는데, 이를 대전법(代田法)이라 한다.

외적에 성공한 반면, 궁전과 이궁을 짓고, 불로장생을 믿어 방사를 모아, 태산에서 봉선의식을 치르고 각지를 순행했으므로 백성들의 원성을 듣기도 했고 군사비를 압박했다.

상홍양은 매점매석 근절과 물가 안정을 위해 증세·신세에다 소금·철을 전매하고 균수법(均輸法)·평준법(平準法)을 제정했다. 균수는 관청에서 상업활동을 하는 것이고 평준은 물가를 조절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후 무공작(武功爵)을 팔기도 하면서 관리의 부정이 심해지고, 국민의 생활도 궁핍해져 각종 반란의 원인이 된다.

▲ 비판받는 점

전한에서 손에 꼽을 명군이라 칭송받는다고는 하나 그 못지 않게 비판도 많은 인물이다.

일찍이 이릉이 중과부적으로 흉노에 잡히는 바람에 투항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때 당대의 학자인 사마천이 "이릉은 힘이 다 떨어져서 항복했으니 선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에 대해 무제는, 본인의 판단도 아니며 무제 본인 후궁의 오빠인 이광리의 부추김으로 이릉에게 극형을 내리는 우를 범했다.

그러나 정작, 이후 이광리는 무제의 태자를 죽이고 자신의 여동생이 낳은 창읍애왕 유박을 태자로 책봉시키려 시도했고 무제는 자신의 후궁을 포함해서 이광리의 구족을 멸했는데 정작 반역의 당사자인 이광리는 흉노에 투항했다.

이런 일을 당하고 나서야 무제는 사마천을 다시 불러들여 과오에 대한 사과를 했다.

흉노 토벌 역시 비판의 대상이다. 전비를 너무 많이 소모하는 바람에 당대의 선진국이었던 전한은 경제가 기울기 시작했고 이는 후한이 경제적으로 탄탄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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