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2월26일]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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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2월26일]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 탄생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1.02.26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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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
빅토르 위고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802년 2월 26일은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 극작가인 빅토르 마리 위고(Victor-Marie Hugo)가 태어난 날이다.

1825년 프랑스 왕실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기사 훈장을 받은 그는 잡지에 문학평론을 싣기도 하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간의 문학 논쟁에 참여하며 낭만주의 문학 이념의 초석을 다졌다.

시집 ‘송가집과 발라드집(Odes et Ballades, 1826)’, 소설 ‘뷔그-자르갈(Bug-Jargal, 1826)’에 이어 1827년 희곡 ‘크롬웰 (Cromwell)’ 서문을 통해 고전주의 문학에 정면 대항했다.

초창기 위고의 작품에는 왕당파적·가톨릭적인 색채가 농후하나 그 후 점차 자유주의 경향이 현저하게 되었다.

그는 "예술은 민중을 위해 만들어지고 모든 것은 신으로 부터 와서 민중에게로 가는 것"이라며 민중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어린 시절과 초창기 작품 활동

1802년 그는 동부 프랑스의 브장송에서 나폴레옹 군대의 고급장교로 알려진 조제프 위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파리의 코르디에 기숙학교(Pension Cordier)에서 독서와 시 창작에 매료됐던 1815~1818년 무렵, 그는 일기에 “나는 샤토브리앙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라고 하며 문인이 될 것을 다짐한다.

1822년에 첫 시집 ‘송가집과 잡영집(Odes et Poesies Diverses)’을 간행하고 그 해에 결혼을 했다.

이후 소설 ‘아이슬란드의 한(Han d'Islande)’등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밖에 1829년 ‘동방시집(Les Orientales)’, ‘사형수 최후의 날(Le Dernier jour d'un condamné)’등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 낭만주의 문학의 지도자

야심적인 위고는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지배하는 의고전파와 대립해 당시의 문단에 발흥하던 낭만주의 운동에 참가했다.

그는 자택에 자신과 같은 경향의 젊은 작가와 화가들을 모이게 함으로써 낭만파의 지도자가 되어갔다.

희곡 ‘크롬웰(Cromwell 1827)’에 붙인 서문은 고전주의 이론에 대항한 낭만주의 연극이론의 선언서로서 유명하다.

7월 혁명의 해인 1830년 2월에는 위고의 희곡 ‘에르나니’의 초연에 즈음해 낭만파와 고전파 사이에는 문학사상 유명한 '에르나니 싸움'(La Bataille d'Hernani)이 일어났다.

이 싸움에서 위고는 고전파의 방해에 대비해 미리 수많은 동지를 '박수치는 사람'으로서 극장 안에 배치, 청년시인 고티에가 빨간 조끼를 입고 싸움의 앞장을 섰던 일화는 유명하다.

상연은 야유와 박수가 엇갈리는 가운데 별다른 지장 없이 끝나 낭만주의는 마침내 결정적인 승리를 획득했다.

▲ 낭만주의의 전성기

이때를 계기로 낭만주의는 고전주의를 압도하며 1850년경까지 프랑스 문단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위고는 더욱 왕성한 활동을 보였고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Notre-Dame de Paris)'을 통해 소설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는 시집 '가을낙엽(Les Feuilles d'automne)',  '황혼의 노래(Les Chants du crépuscule)', '마음의 소리(Les Voix intérieures)', '빛과 그늘(Les Rayons et les ombres)'을 발표했다.

희곡으로는 상연 금지를 당했던 희곡 '마리용 들로름(Marion Delorme)'을 비롯해 '왕은 즐긴다', '뤼크레스 보르지아(Lucrece Borgia)', '마리 튀도르(Marie Tudor)', 운문극 '뤼 블라스(Ruy Blas)' 등을 발표했다.

1841년 빅토르 위고는 대망의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임명, 작가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다.

▲ 위고의 작품에 대한 평가

그의 작품에는 가난한 노동자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이 묻어 있다. 1869년에 쓴 '황량한 세월(Les Années Funestes)'이나, 국내에 잘 알려진 '레미제라블'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위고의 83년간에 걸친 일생은 19세기의 대부분을 차지해 사회의 변천과 함께 그의 사상과 작품은 보수주의에서 자유주의 또한 공화주의로 크게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일관해 흐르는 것은 인류가 한없이 진보할 것이라는 낙관적 신뢰와 이상주의적 사회 건설을 향한 불 같은 정열이다.

위고의 시는 시대의 낭랑한 메아리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이렇게 너무나 낙관적인 이상주의적 태도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이 정열적인 웅장함은 감상에 빠지기 쉬운 낭만파 시인에게는 볼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그의 비길 데 없는 천성과 함께 위고를 낭만파 지도자로 만들었고, 위고가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불리는 데 일조했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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