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2월 4일]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 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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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2월 4일]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 선출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1.02.04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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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년 2월22일~1799년 12월14일)’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날이다.  

헌법제정회의에서 새로운 연방헌법을 제정하고 중앙정부 권한을 강화한 그는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돼 여러 세력의 단합과 헌법의 실현 등을 펼쳐 신생국 미국의 기반을 다졌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를 이끈 그는 가장 훌륭한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한명으로 여겨지고 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미국의 1달러 지폐에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 독립전쟁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

그는 1732년 2월 22일 버지니아 식민지의 웨스트모얼랜드 카운티, 오늘날 콜로니얼 비치 인근에서 부친 어거스틴 워싱턴과 두 번째 부인인 메리 볼 워싱턴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독학으로 토지측량관이 되었고 1752년 이복형이 죽자 광대한 마운트버넌의 토지와 버지니아 민병대의 부대장직을 이어받아 1754년 미국 7년전쟁인 ‘프렌치인디언전쟁’에 참전했다.

애팔래치아산맥 서쪽의 땅이 프랑스인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반대한 그는 본국과 식민지와의 항쟁이 일어나자 서부의 토지문제를 놓고 본국의 정책에 크게 반발했었다.

또, 버지니아의회 의원으로써 1765년 P.헨리를 지지해 인지조례의 반대를 관철하고 1769년에는 타운센드법을 반대해 의회가 해산당하자 영국상품의 불매동맹을 결성도 했다.

1774년 제1회 대륙회의와 1775년 제2회 대륙회의에 버지니아 대표로 참석해 회의에서 결의된 ‘무력항쟁’ 저항으로 그는 독립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된다.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피로에 지친 식민지군을 격려하고 역경을 극복한 그는 1781년 10월 프랑스군의 원조를 받아 ‘요크타운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통해 마침내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한다.

그는 1783년 강화조약이 체결되자 군대를 해산시킨 뒤 연합회의에 군의 통수권을 반환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연합회의에서 각 주의 이해관계 때문에 중앙정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되자 다시 연합회의에 참여해 국가의 운영원칙을 세우고 제헌의회를 구성한다.

1787년 헌법제정회의를 열고 워싱턴은 의장직을 맡아 새로운 ‘연방헌법 제정’과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했다.

그는 연방헌법에 의거 1789년 2월 4일 대통령에 선출되고 4월 30일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 초대 대통령 취임

워싱턴의 공식 포스터
워싱턴의 공식 포스터

그는 새로운 민주주의 정부 체제에서 전례 없는 역사를 창조하는 막중한 임무를 엄격하고 합리적으로 수행해 간다.

특히 행정부 구성을 위한 공정한 인사권을 발휘해 혈연, 지연, 학연, 종교, 친구관계 등은 제외하고 오직 능력에 따라서 재무장관(알렉산더 해밀턴)과 국무장관(토마스 제퍼슨), 국방장관(헨리 녹스), 법무장관(에드문트 랜돌프)를 임명한다.

외교적으로는 중립노선을 고수해 1793년 발발한 프랑스와 영국과의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하고, 유럽의 분쟁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중립주의적 외교정책’을 펼쳤다.

이와 함께 경제적으로는 ‘국립은행 창설’과 위스키 반란 사건 진압 등을 통한 연방정부가 주정부 보다 우월성이 높다는 걸 확립시키고 ‘내각제도 정립의 기초’와 국외의 관계에서의 최고 지도자로서 대통령의 지위를 확립시켰다.

그는 대통령 취임 후 재선은 수락했지만 3선은 파멸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대통령 임기가 6개월 남은 1796년 9월 17일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고별연설’을 발표한다.

“조국에 대한 고마움과 수 세대에 걸친 선조들과 이 땅에 뜨거운 애정을 느끼면서 나는 은퇴 후에 누리고자 스스로 다짐했던 생활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해봅니다”라고 전했다.

1797년 3월 4일 워싱턴은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는데 이는 초대 대통령의 자발적인 선택에 따른 평화로운 정권교체였다.

퇴임 후에 고향에 돌아갔지만 1798년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으로 다시 연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 됐지만 다행히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지 워싱턴은 1799년 2월 긴 유언장을 작성하고 그해 12월 14일 “죽은 후 사흘이 되기 전에 묻어주오”라고 부탁한 후 세상을 떠난다.

그의 유언장에는 “개인 시중을 든 윌리엄을 노예 신분에서 즉각 해방하고 그에게 연금 30달러를 주고 아내가 죽으면 나머지 노예들도 해방시켜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전해졌다.

▲ 사후 평가

워싱턴의 동상
워싱턴의 동상

예비역 미국 육군 중장 출신인 그는 사후 1862년 2월 22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 의해 명예역 미국 육군 대장으로, 1869년 12월 14일 율리시스 그랜트 대통령에 의해 명예역 미국 육군 원수로 각각 추서됐다.

그 후 107년이 지난 뒤 1976년 7월 4일 제럴드 포드 대통령에 의해 명예역 미국 대원수로 추서됐다.

조지 워싱턴의 전기를 쓴 브래들리 T. 존슨은 “워싱턴은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감정이 격했지만 뛰어난 자제력을 발휘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강한 의지력은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정신, 현명함, 관용, 정의감과 조화를 이루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천재성은 없었지만 그는 신속한 통찰력과 정확한 판단, 그리고 지식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열성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가 1799년에 향년 67세로 사망했을 때 헨리 리는 장례식 연설에서 "전쟁에서도 으뜸, 평화에서도 으뜸, 그리고 그의 국민들 마음 속에서도 으뜸(First in war, first in peace, and first in the hearts of his countrymen)“이라고 칭송했다.

대통령제를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미국에서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직을 구체화하는 업적을 이룩하고 유명한 '고별사'를 발표해 떠날 때를 아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준 대통령으로 미국의 민주주의를 창조해내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라 평가 받는다.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 두산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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