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2월 3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성재 ‘이시영’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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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2월 3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성재 ‘이시영’ 선생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0.12.0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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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인으로 대한민국 제 1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李始榮)’ 선생이 출생한 날이다.

초대 부통령 성재 '이시영' 선생
초대 부통령 성재 '이시영' 선생

이시영(李始榮, 1868년 12월 3일~1953년 4월 17일) 선생의 본관은 경주로, 자는 성흡, 성옹, 호는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으로 본명은 성흡(聖翕)이다.

선생은 조선 1885년 사마시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189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후 부승지, 우승지에 올라 내의원 부제조, 상의원 부제조 등을 지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 해 일가족 40인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고 1919년 9월 통합 임정 수립 이후 김구, 이동녕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수호하는 역할을 했다.

광복 이후 귀국해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임정 요인의 단정론과 단정반대론으로 나뉘었을 때 단정론에 참여했다.

이후 1948년 7월24일부터 1951년 5월9일까지 대한민국의 제1대 부통령 역임과 제2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했으나 낙선했다.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이었음에도 그는 개인적으로도 사치하지 않고 근검절약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그는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리던 명문가의 후손으로서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형 건영(健榮)·석영(石榮)·철영(哲榮)·회영(會榮), 동생 호영(頀榮)과 함께 6형제가 전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유년기

이시영 선생은 1868년 12월 3일 조선 한성부 저동에서 고종 때 이조판서와 의정부우찬성을 지낸 아버지 이유승과 어머니 동래 정씨의 다섯째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유승은 효정공으로 과거에 급제해 삼사를 두루 거쳐 평안남도 안렴사, 좌부승지, 부제학 등을 거쳐 외직인 영변군수로 나갔고 이조참의, 가선대부, 시강원보덕, 가의, 자헌대부, 정헌대부 등을 거쳐 숭정대부와 이조, 예조, 형조, 공조의 판서를 거쳐 의정부좌찬성, 숭록대부에 올랐다.

어머니 동래 정씨의 외가는 중종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의 후손으로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의 딸이다.

유년기에 선생은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해 갑오경장 당시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의 딸인 1년 연상인 경주 김씨와 결혼했다가 사별 후 15년 연하의 반남 박씨와 재혼했다.

임정 요인들과 함께 (뒷쪽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차이석, 김구, 조성환, 송병조 조완구, 이동녕, 이시영
임정 요인들과 함께 (뒷쪽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차이석, 김구, 조성환, 송병조 조완구, 이동녕, 이시영

관직생활

그는 189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부승지에 이어 우승지에 올라 내의원·상의원의 부제조를 겸했다. 다시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궁내부(宮內部) 수석참의(首席參議)를 역임하고 1896년 장인인 김홍집이 살해되자 사직했다.

1905년 외부교섭국장에 재등용되고 1906년 평남 관찰사로 나갔다가 1908년 한성재판소장 ·법부 민사국장·고등법원 판사 등을 역임했다.

1909년(융희3년) 대한제국 법부 법률기초위원이 되고 1910년 10월 1일 한일합방조약 체결로 관직을 사퇴했다.

독립운동과 그후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만주로 망명해 류허현에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뒤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가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재무총장을 역임했다.

1929년에는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해 초대 감찰위원장에 피선되고 1933년 임시정부 직제 개정 때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귀국했다.

그뒤 대한독립촉성회 위원장으로 활약하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제헌국회에서 초대 부통령에 당선됐다.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하여 헌신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견제와 실정으로 뜻을 펴지 못하다가 1951년 '거창 양민학살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의 실정과 부패를 성토하는 ‘국민에게 고한다’라는 성명서를 국회에 전달하고 부통령직을 사임한다.

이후 한동안 정계를 떠나 있다가 1952년 5월 민주국민당의 거듭된 요청으로 제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10.9%의 득표에 그쳐 이승만(74.6%)·조봉암(11.4%)에 이어 3위로 낙선한다.

'이시영' 선생 국민장 장례식 모습
'이시영' 선생 국민장 장례식 모습

1953년 4월 17일 피난지인 부산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장례는 국민장(國民葬)을 치른 뒤 서울의 정릉 남쪽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지금의 강북구 수유동 73-3번지로 이장됐다.

한편 2009년 선생의 후손들이 작은 연금으로 이시영 묘소 앞 움막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독립운동가 후손에 대해 어떻게 처우를 해야할 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들었다.

 

*출처: 위키백과 / 두산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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