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4월 28일] 7선 국회의원을 지낸 야당 정치인 '유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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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4월 28일] 7선 국회의원을 지낸 야당 정치인 '유진산'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1.04.28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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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유진산(1905년 10월 18일 ~ 1974년 4월 28일)은 독립 운동가이면서 1954년부터 3~9대까지 7선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전라북도 진산군(충남 금산군) 출신인 그는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이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정국에는 우익청년단체를 만들어 활동한 그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반민특위에서 친일파 단속, 척결활동을 펼쳤다. 야당 정치인으로 신민당 총재와 대표 등을 역임했다. 오늘은 그가 사망한 날이다.

▲ 어린시절

전라북도 진산군(충남 금산군)에서 출생했다. 아명은 유영필이었고 호는 옥계이다.

유진산은 1918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1919년 2학년 때 3.1운동에 참가했다.

교내 독립만세 벽보사건으로 인해 경성고등보통학교를 2학년 때 자퇴하고, 이후 보성중학교로 편입했다. 1923년에 경성보성고보를 졸업하고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예과에서 영어를 수학한 뒤, 와세다 대학에 입학한 후 정경학부를 다녔다.

독서회 사건으로 이치가니 형무소 투옥되었다. 이 때문에 3학년 재학 중 다시 대학교도 중퇴했다.

▲ 농민-독립운동

1932년 쌍엽농민회를 조직해 농민운동에 나선 그는 조선총독부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당했다.

이를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1933년 장시성 난창에서 한인회를 조직하고, 충칭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34년 일본 영사관 관헌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간 구금되기도했다. 

그는 이후 광복까지 ‘농민독본’을 편집하면서 진산이란 필명으로 전진한, 김산 등과 농민운동을 전개했다. 이 무렵부터 조병옥·백관수·장택상 등을 줄곧 만나 교류했다. 

태평양 전쟁 이후 창씨개명을 거절하고 버티다가 1942년 만주로 건너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만주 연락원이 되었으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주청년동맹을 만들어 최고위원이 되었고, ‘백의사’ 같은 비밀 우익 단체에서의 활동을 시작으로 정계에 투신해, 국회의원이 되었다.

반민특위 활동

유진산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에서도 활동하여 친일파 단속 및 검거활동을 진행했다. 이로 인해 1949년 당시 노덕술 등 친일파들이 시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및 정부요인 암살음모사건의 암살표적으로 되기도 했다.

그는 여러 번 살해, 암살 협박을 받았으나 뜻을 굽히지 않다가, 반민특위가 강제 해산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1949년 3월 18일 ‘고려역도구락부’ 창립에 참가해 부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 정치 투신

광복 직후 우익청년단체 흥국사를 조직하여 좌익의 최대단체였던 건청을 해체시키고, 이른바 조선인민공화국의 인민대표자회의를 강제 해산시켰다. 1945년 12월 김구가 반탁을 주장하며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하자 유진산 역시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가담했다.

이후 해방정국에서 전진한, 김두한 등과 비좌파와 우파적 성향의 노동운동단체와 청년단체에서 활약했으며 1946년 4월 9일 좌익청년단체 조선민주청년동맹에 대항한 반공주의 우익 청년단체 대한민주청년동맹을 조직, 결성하고 대한민청 회장에 당선됐다.

김두한을 감찰부장으로 임명해 활동하였으나, 미군정에 의해 포고령 위반으로 해산명령을 받고 1947년 폐지할 듯 하다 단체의 이름을 '청년조선총동맹'이라는 조직으로 이름을 바꾸고 계속 반공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후 이승만의 청년단체 통합 지시로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등 다른 청년단체들과 통합하여 1948년 12월 통합 출범한 '대한청년단'에 가입했다. 이후 대한청년단 최고지도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54년 무소속으로 제3대 민의원의원에 당선, 그 해 4사5입 개헌 때에는 신익희·조병옥 등과 호헌동지회를 발족시켰다. 1955년 신당발기추진8인위원회 위원, 1956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 선거참모를 거쳐 1958년 제4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어 민주당 원내총무가 되었다. 1960년 불온문서·원면부정 사건의 국회조사위원장,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후보 선거참모를 지내며 제5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4·19혁명 후 출범한 장면정권에 도전, 민주당의 신·구파를 보수양당으로 분당시켜 1961년 2월 김도연 등과 구파 중심의 신민당을 창당했다. 그는 간사장이 되어 그 해 3월 윤보선 대통령이 초청한 청와대시국수습4자회담에 참석했었으며, 5·16군사정변 때에는 55일간 마포형무소에 구금되었다.

1962년 박정희의 3·22 군정연장성명에 반대하는 민주구국선언대회를 주도했다. 민정이양이 된 1963년 5월 민정당을 창당하여 김병로를 당대표로 추대하고, 그 해 11월 전국구로 제6대 국회에 진출했다.

1965년 통합야당인 민중당 창당에 참여한 그는 1967년 신민당 부총재가 되었으며, 그 해 서울 영등포에서 제7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됐다. 1970년 신민당 총재에 당선된 그는 그 해 8월 박정희와 단독회담을 가졌다. 

1971년 총선에서 영등포 지역구를 포기하고 자신이 전국구 1번을 결정한 그는 이른바 ‘진산파동’으로 총재직을 사임하였다가 다시 당권에 도전해 1972년 총재에 재선되었으나, 불법전당대회에서의 당선이라는 이유로 법원에 피소되어 당수권한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1973년 전당대회에서 다시 당수로 당선되어 같은 해 제2차 박정희·유진산 회담을 가졌다.

▲ 작고

그는 1974년 초 유신헌법개헌투쟁을 선언하고 나섰으나 병으로 실패하고 그해 4월 28일에 결장암으로 사망했다. 5월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유진산은 작고할 때 서울 상도동에 집 한 채밖에 없었다 한다. 그나마도 2천만 원 가까운 부채로 은행에 저당 잡혀있었다. 당시 이를 딱하게 여긴 김종필 국무총리가 '집안이 거의 폐가가 됐으니 정치인의 말로가 너무 허무하지 않느냐' 며 모금을 주선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전경련 등 3개 경제단체와 여·야 의원들이 모금한 돈은 총 3천만 원에 이르렀는데, 당시 김진만 국회부의장을 통해 돈을 전달하면서 모금자들의 뜻에 따라 저당 잡힌 집을 찾고, 남은 돈으로 미망인 생계 기금을 써 달라고 했다.

*출처: 위키 백과 / 다음 백과 /온라인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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