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4월23일] 양자역학의 아버지 '막스 플랑크'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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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4월23일] 양자역학의 아버지 '막스 플랑크' 출생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1.04.23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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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플랑크
막스 플랑크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858년 오늘은 양자역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카를 에른스트 루트비히 플랑크’가 태어난 날이다.

그는 스위스의 아마추어 과학자에 불과하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발굴한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1차 대전 기간 중 과학계의 교류가 완전히 중단되는 것을 막고자 노력했다.

인격적으로도 많은 동료와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독일 민족주의와 나치즘 사이에서 최후까지 균형을 유지하고자 애쓴 원로 중 한 사람이었다.

플랑크는 양자역학의 창시자인 동시에 독일 과학계의 수장으로 후배 과학자 발굴과 과학계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 성장기

플랑크는 독일의 북부 지방인 키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법률가, 목사, 학자를 다수 배출했으며, 아버지는 유명한 법학 교수로 독일의 민법을 만드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플랑크의 집안은 모든 일에 정직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에 헌신하며 강인한 정신으로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을 중시했다.

독일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플랑크는 조국 독일에 대한 애국심과 독일 문화 및 학문에 대한 긍지를 키워 갔다.

학창 시절의 플랑크는 매우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강한 학생이었으며, 어학, 수학, 역사, 음악 등 모든 과목을 골고루 잘 했다.

특히, 그는 음악을 매우 좋아해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을 평생의 취미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1874년 막스밀리안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뮌헨 대학에 입학한 플랭크는 물리학을 전공해 학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 열역학 이론에의 매진

플랑크는 뮌헨 대학에서 열역학 이론을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지도교수였던 욜리(Philipp von Jolly)는 열역학이 별로 유망하지 않다고 말했다.

열역학의 기본 원리들이 모두 발견된 데다 이론물리학도 거의 완성 상태에 도달했으므로 아마도 더 이상 연구할 만한 주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플랑크는 이 말을 듣지 않았고, 1878년에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와 키르히호프(Robert Kirchhoff) 밑에서 배웠다.

두 교수는 당시 물리학의 대가였고 플랑크의 동급생 중에는 1887년에 전자기파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증명했던 헤르츠(Heinrich Hertz)도 있었다.

플랑크는 1년 반 동안 열역학 연구에 매진한 결과 1879년 6월에 「열역학 제2법칙에 관하여」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 최고 성적으로 졸업했다.

▲ 학자로서의 활동

1880년 뮌헨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1885년에 고향 킬로 돌아가 1886년에는 마리 메르크와 결혼한다. 1889년에는 베를린으로 가 이론 물리학과장을 맡는다.

1899년 새로운 기본 상수인 플랑크 상수를 발견한다. 일 년 후 플랑크의 복사 법칙이라 불리는 열 복사 법칙을 발견한다.

이 법칙을 설명하면서 그는 최초로 ‘양자’의 개념을 주창했고, 이는 오늘날 양자역학의 단초가 된다.

1905년에서 1909년 사이 플랑크는 독일 물리학회의 회장으로 활동하다 1913년 베를린 대학교의 학장이 됐다.

이후 1918년에 양자역학의 기초를 마련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1930년부터 1937년까지 플랑크는 카이저 빌헬름 학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 불우했던 개인사

제2차 세계 대전 중 플랑크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유대인 과학자들을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고 설득하려 했다.

플랑크의 아들 에르빈(Erwin)은 1944년 6월 20일의 히틀러 암살 기도와 연루돼 처형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괴팅겐에서 그가 사망한 후, 카이저 빌헬름 학회는 그의 이름을 따 막스 플랑크 연구소(Max-Planck-Gesellschaft zur Förderung der Wissenschaften; MPG)로 개명했다.

막스 플랑크 자신은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생존했으나, 둘째 아들 에르빈 외에 장남 카를 플랑크 역시 1차 대전 중 서부 전선에서 전사했다.

그의 딸은 출산 중 사망했으며, 그가 아낀 많은 후배 과학자들이 유대인 박해 때문에 고초를 입거나 망명하는 등 세계대전의 여파는 플랑크의 개인사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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