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4월 21일] 일본 신사참배 거부운동 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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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4월 21일] 일본 신사참배 거부운동 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1.04.21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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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주기철(1897년 11월 25일 ~ 1944년 4월 21일])은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창원(웅천) 출신으로 장로교 목사이다. 원래 이름은 주기복이다. 한상동 목사와 더불어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 오늘은 그가 사망한 날이다. 주기철 목사는 손양원 목사와 더불어 한국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 중에 하나로 손꼽힌다.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

▲ 목회 활동

주기철은 경상남도 창원(웅천)에서 태어나 사립 개통소학교를 거쳐,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해 1916년 졸업했다. 다음 해 서울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하였으나 안질 때문에 곧 중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웅천교회에서 집사로 봉직하던 어느 날 김익두 목사의 설교에 감동되어 성령을 받고 중생 체험을 했다.

1921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1926년 졸업하고. 1926년 부산 초량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였고 경남성경학원을 세워 후진교육에 힘썼다.

초량교회가 있는 초량 지역 인근은 일본인 거주지와 지리적으로 가까웠으며 개항 이후 왜관이 설치되고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상인들이 많이 왕래했다. 이에 초량교회의 교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상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독립운동의 자금 조달을 담당하였던 백산상회를 설립한 안희제와 윤현진 등이 초량교회의 교인으로 출석했다. 초량교회가 신앙 활동의 중심지이면서 동시에 민족주의적인 경향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1931년 9월 마산 문창교회의 위임목사로 부임하면서 전국에 이름이 난 저명한 목사로 부각되기 시작됐다. 주기철은 1931년 여름부터 1936년까지 마산교회(문창교회) 담임 목사로 봉사를 했다.

▲독립운동

1930년대 후반 일본이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통해 제국을 더욱 확장하려고 조선과 대만 등의 식민지를 황민화 정책과 군국주의 노선을 통해 지배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 교회에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는 신사 참배를 강요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그가 평양에 부임하기 1년 전부터 평양교회와 신학교를 괴롭혔고 결국 평양의 숭실학교나 평양신학교는 1938년에 각각 폐쇄됐다.

신사참배에 대한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한 주기철은 1939년 7월 경상북도 의성의 ‘농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검속 됐다.

1940년 2월에 석방되어 평양으로 돌아온 뒤, 산정현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를 최후로 교인들에게 전했다. 이 설교 사건으로 경찰이 이틀 후에 그를 검거하였고, 그때 산정현교회 목사직을 파면 당하였다. 파면은 평양노회의 결의형식이었다. 그리고 산정현교회도 동시에 폐쇄되었다.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주기철은 감옥에서 5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4월 13일 병감으로 옮겨지고 4월 20일 부인 오정모와 마지막 면회를 한 뒤 그해 4월 21일 감옥 에서 병사했다. 그의 나이 47세 때였다. 그의 유해는 1944년 4월 25일 평양 근처 돌박산 기독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고 1968년 국립묘지 안장됐다. 1983년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정에 기념비를 세웠다.

*출처: 위키 백과 / 다음 백과 /온라인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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