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4월 8일] 천도교 지도자, 민족대표 33인 ‘손병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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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4월 8일] 천도교 지도자, 민족대표 33인 ‘손병희 선생’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1.04.08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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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천도교(동학) 지도자이면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의 한명인 ‘손병희(孫秉熙, 1861년 4월 8일~1922년 5월 19일) 선생’이 출생한 날이다.

본관이 밀양인 손병희 선생의 자(字)는 응구(應九)이고 최시형에게 받은 도호는 의암(義菴)이다.

▲ 동학과의 만남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 선생'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 선생'

충청도 청주목(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세금징수를 담당하는 향리의 아들로 태어난 손병희 선생은 1882년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동학의 교리와 조카 손천민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했다.

1885년 최시형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됐고 손병희에게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꿋꿋할 것을 지도했다.

그는 ‘동학농민운동’ 당시 북접 소속으로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관군에 맞서 싸웠으나, 1894년 관군과 일본군의 폭력으로 신도들이 순도(순교) 하는 모습을 보게된다.

이후, 그는 관군의 추격을 피해 원산과 관서 지방으로 피신해 ‘동학농민운동’ 실패로 무너진 동학의 재건과 포교 활동에 전념한다.

1897년 최시형 선생의 뒤를 이어 제3대 교주가 된 그는 근대화 운동에 앞장선다. 1889년 ‘혹세무민 죄목’으로 스승인 최시형이 처형 당한다.

▲ 개화 운동 활동

그는 이후 독립협회ㆍ개화파 인물들과 만나 동학에 입교시키고 이들로부터 개화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러다 그는 중국으로 피신했다가 거취가 어려워 1901년 일본으로 망명한다.

일본에서 같은 망명자 신분이던 오세창, 권동진, 박영효, 조희연 등 개화파 전직 관료들과 교류하고 상하이와 메이지 유신(1867년) 이후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던 도쿄 등을 돌아보면서 인재 양성이 시급함을 깨달았다.

1903년부터 24명의 똑똑한 청년들을 선발해 일본에 유학시키고 신문 기고 등으로 내정개혁론과 근대화론을 설파한다.

1904년에는 갑진 개혁운동을 일으킨 권동진, 오세창과 더불어 ‘진보회’를 조직하고 회원들에게 머리를 자르고 개화복을 입을 것을 명하는 등 개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 귀국 후 독립운동

손 선생은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 일본에서 귀국했다. 그는 천도교 내부송병준, 이용구 등이 주축이 된 친일조직 일진회에 대해 출교처분을 내린 후 이들과 결별한다.

이후 교령 자리를 박인호에게 승계하고 교육 사업(보성전문학교, 동덕여학단 인수)과 출판사업에 몸 담근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운동을 주도했다가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직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병 보석으로 출옥한 뒤 1922년 5월 19일 상춘원에서 별세했고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사후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그의 동상은 충북 청주의 삼일공원에 충북 출신 민족대표 33인인 권동진, 권병덕, 신홍식, 신석구와 함께 설치됐고 청원군 생가 자리에는 기념관이 있다.

그의 저서로는 일본 망명 시절에 국부 달성과 근대화를 주장하며 저술한 ‘삼전론(三戰論) 1902년’, ‘명리전(明理傳) 1903년’ 등과 ‘수수명실록, 도결(道訣), 천도태원설(天道太元說), 대종정의설(大宗正義說)’ 등 약 20여권을 지필했다.

가족 관계로 어린이 운동으로 유명한 방정환 선생이 손병희의 사위이다.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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