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4월 1일] 헤이그 특사 ‘이상설 선생’...독립운동에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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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4월 1일] 헤이그 특사 ‘이상설 선생’...독립운동에 헌신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1.04.01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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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1907년 고종의 특사 자격으로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파견돼 한국 독립을 호소한 ‘이상설(1871년 1월27일~1917년 4월1일)’ 선생이 타계한 날이다.

자(字)는 순오(舜五), 호(號)는 보재(溥齋)로 본관은 경주이다.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911년 권업회 창설과 1914년 러일전쟁 10주년 기념일을 기해 ‘대한광복군’ 정부 수립을 주관하고 정통령 선임 되는 등 해외 독립운동에 큰 업적을 남겼다.

“동지들은 합세해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그는 1917년 4월 1일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죽기 전 소중한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 생애

'헤이그 특사' 이상설 선생
'헤이그 특사' 이상설 선생

이상설 선생은 1870년 12월 7일(음력)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태생으로 생부는 이행우(行雨)였으나 7세 때인 1876년 참의를 역임한 동부승지 이용우에게 양자로 입적됐다.

이후, 1894년 전시에 병과로 급제하고 1896년 성균관 교수가 되어 탁지부재무관에 임명된다.

그는 이 무렵 ‘호머 헐버트’와 친교를 맺었다.  신학문을 접한 그는 1900년 일본에서 인기 있던 우에노 기요시의 근세산술(近世算術)을 번역 편집해 저서인 ‘산술신서(算術新書)’를 편찬한다.

1904년 일제가 황무지의 개간권을 요구할 때 박승봉과 연명으로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8월에는 보안회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大韓協動會)’의 회장에 선임되고 1905년 법부 협판, 의정부 참찬을 지냈다.

그는 외국 서적 등을 참조해 ‘만국공법(萬國公法)’ 등 법률을 연구해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 조병세(趙秉世) 등과 협의, 조약의 무효를 상소하고 돌에 머리를 부딪혀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에 그쳤고 자결을 시도하는 장면은 백범일지에 김구 선생이 당시 모습을 기록하기도 했다.

▲ 독립운동

선생은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게 되자 국외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판단하고 1906년 이동녕 등과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노우키에프스크에 이주해 ‘원동임야회사’를 세우고 간도 룽징춘으로 가 ‘서전서숙’을 설립해 조선에서 이주해온 국민에 자녀 교육과 항일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당시 룽징춘은 항일의식을 가진 조선인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독립운동기지로 역할을 했다. 선생은 용정을 중심으로 최초로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중심적인 인물로 활약했다.

이후, 1907년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과 함께 참석해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이 내용을 전 세계에 알리려 했으나 일본의 계략으로 참석을 거부당했다.

그는 7월 5일 만국평화 회의장에 나가 호소하는 글 “우리들은 삼가 황제의 뜻을 받들고 귀국 총통과 대표에게 눈물로써 고하나니 우리 한국이 1884년에 자주 독립국이 된 것은 공인된 사실이고 이로써 각국과 수교를 계속해 온 것이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 이후 일본이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압박하여 각국에 대한 국제 교섭의 권리를 강탈하였다” ▲모든 정무를 우리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시행하는 것 ▲일본이 육해군의 세력을 믿고 한국을 압박하는 것 ▲일본이 한국의 모든 법률과 풍속을 파괴하는 것 등이니 총통께서는 정의에 근거하여 처단하라“

”한국은 자주국인데 어째서 일본이 한국의 국제 교섭에 간여하여 우리나라 황제의 명을 받든 사절단이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가“며 ”귀국 총통 및 대표는 위기에 빠진 약소국을 돕고 조력을 베풀어 우리 사절단을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시키고 모든 호소를 허용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막힘 없이 불어로 발표했다.

헤이그 특사의 실패 후 일제는 궐석재판에서 그에게 사형을 언도 했고 이에 따라 그는 죽을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서 1908년 이후 대한제국의 관직에서 은퇴했다.

이후, 미국에서 대한제국의 독립 지원을 계속 호소하는 한편, 각지의 미주 한인교포를 결속시키는 데 힘쓰고 콜로라도 주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에 연해주 한인대표로 참석한다.

1909년에는 ‘국민회(國民會)’ 중심의 독립운동 확대를 위해 이위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권업신문' 간행과 한인학교 확장 및 교포의 경제향상 등을 전개했다.

1910년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연해주와 간도등의 한인들을 규합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한일합병의 반대운동을 전개했으며 미국, 러시아 제국, 청나라 등에 일제의 침략규탄과 한민족의 독립결의를 밝히는 선언서를 보냈다.

1914년 이동휘, 이동녕, 정재관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 제국령 안에서 규합하는 최초의 망명정부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고 정통령에 선임된다.

1915년에는 상하이시에서 박은식, 신규식, 조성환 등과 신한혁명당을 조직해 본부장에 선임된다.

이후, 1917년 4월 1일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사후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이상설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1971년 숭모비(崇慕碑)를 건립했다.

또한, 1975년에는 숭렬사(崇烈祠)를 건립하고 정부에선 2005년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중앙), 이위종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중앙), 이위종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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