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3월 25일] 근본주의 기독교 신학의 시조 ‘길선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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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3월 25일] 근본주의 기독교 신학의 시조 ‘길선주’ 목사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1.03.25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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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한국 근본주의 기독교 신학의 시조이며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길선주(1869년 3월25일~1935년 11월26일)’ 목사가 출생한 날이다.

그의 아호는 영계(靈溪)로 평안남도 안주 출생이다.

▲ 생애

길선주 목사
길선주 목사

길 목사는 젊은 시절부터 종교에 관심이 많아 무와 선도에 심취해 입산 수도하다가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1897년 개신교에 입문한다.

1897년 안창호가 독립협회 평양 지부를 설립할 때 발기인이 되는 등 기독교 계열 인사들과 함께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1907년 1월 6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를 위한 새벽기도회를 인도 하던중 대중 앞에서 회개를 시작해 ‘평양대부흥’이 됐다.

이 사건 이후 “고백과 뉘우침, 새로운 삶”을 선언하는 운동이 전국의 교회로 확산되어 전국의 기독교인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평양대부흥 운동’ 또는 ‘성령 대부흥 운동’이라 한다.

그는 1907년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 일곱 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고 기독교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보여 평양의 숭실학교와 숭덕학교 경영에 참여했다.

1911년 ‘105인 사건’ 때 체포되었는데 이때 신민회 회원인 장남 길진형은 고문으로 1917년 사망했다.

그는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하고 3.1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당시 도장만 이승훈에게 전달했고 3월 1일 당일에는 지방에 있어 태화관 독립선언서 낭독 모임에는 참가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후 태화관 모임 불참 사실이 확인됐지만 체포됐다. 미결수로 2년 가까이 구류되고 체포된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하게 무죄 판결을 받는다.

최초의 한국인 목사 7인 (1907년 9월7일 평양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 기념 사진)<br>사진 뒷줄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방기창, 서경조, 양전백, 송린서, 길선주, 이기풍, 한석진<br>목사
최초의 한국인 목사 7인 (1907년 9월7일 평양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 기념 사진)
사진 뒷줄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방기창, 서경조, 양전백, 송린서, 길선주, 이기풍, 한석진
목사

그후 목회 활동을 하다 1935년 평안남도 강서의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뇌출혈로 순직한다.

▲ 사후 평가

배덕만 교수는 그에 대해 “미국의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수용해 한국 기독교의 대중화를 시킨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제임스 게일은 길선주 목사의 스승으로 그의 책 ‘주님이 오신다(Jesus is Coming)’에 길 목사는 “한국 근본주의 기독교 신학의 시조”라고 표현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길선주는 무죄를 선고받았기에 독립운동 관련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다 그가 1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사실이 이후 확인되어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가족으로는 신민회 회원으로 고문 후유증으로 1917년 사망한 장남 길진형과 차남 길진경 목사, 3남 길진섭 화백이다.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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