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3월 24일] 독립운동가 소래 ‘김중건’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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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3월 24일] 독립운동가 소래 ‘김중건’선생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1.03.24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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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김중건(1889년 12월 6일 - 1933년 3월 24일)은 1910년 만주로 들어가 1933년 중국 공산계열  길림구국군에 납치되어 순국할 때까지 동만주 일대에서 대한국민단으로 민족교육과 농촌활동에 전념하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오늘은 그가 사망한 날이며 그의 아호는 소래이다.

독립운동가 김중건 선생

▲  교육 및 종교 

김중건은 함남 영흥군 고령면 연동리에서 출생했다. 한학을 익혀 서당을 운영하던 그는 1907년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토국민신보’라는 사설을 읽고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일제침략의 주구로만 치부했던 신학문에 대한 인식을 바꿔 계몽주의 속에 담긴 자주성·주체성에 주목했다.

근대적 사회 개혁을 위해 신학문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08년 선생은 자신이 운영하던 서당을 근대학교인 연명학교로 개조해 50여 명의 청년과 아동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그는 근대적 사회 개혁을 꿈꾸었으며 향리에서의 교육뿐 아니라 폭넓은 무대에서의 종교 활동에도 뜻을 두었다.

이때, 천도교도들 중 이용구 계열이 중심이 된 일진회가 일한합방상주문을 제출하며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재촉하자 ‘천도교 월보’에 토일진회라는 제목으로 일진회를 비판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 원종 창립

김중건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기존의 천도교단을 통한 구국 운동을 비관적으로 보게 되어, 고향으로 낙향한 뒤 독자적인 우주관을 정립하고 천도교 교단의 개혁을 촉구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한다. 이로인해 천도교에서 출교당하고 1913년 그는 원종을 창립한다.

1914년에는 원종 신도들과 함께 북간도로 망명하고 학교를 설립해 민족 교육을 실시하다가 1917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는 다시 간도 지역을 무대로 원종 포교 활동을 벌이며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자신의 이념을 설파했다. 그의 사상은 농촌 중심의 개혁을 통해 국가가 없는 이상촌을 건설한다는 것으로 아나키즘과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김중건선생 어록비

▲ 독립 운동

1920년 그는 원종 교도들을 규합해 ‘대진단’을 조직했다. 이 조직은 기본적으로는 사상 단체였으나 무장 조직이었다. 1921년 무장 독립 운동 단체들이 연합해 대한국민단이 결성될 때도 참가했다.

이후 그는 ‘새바람’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다가 다시 체포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1929년에 북만주의 황무지 지역에 공동 생산 공동 분배가 이루어지는 이상적 농촌 공동체 어복촌을 건설해 운영했다. 이 공동체에서는 평소 교육과 군사 훈련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만주사변 이후 부대를 일으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원종 부대가 일본군에게 패퇴해 어복촌으로 물러나 있던 중 그는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 부대인 장참모의 길림구국군과 이광 부대 등과 갈등을 빚었다. 결국 1933년 소련 연합군과 길림구국군에게 납치돼 피살됐다.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남양주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유고 문집 ‘소래집(1969)’이 있다.

*출처: 위키 백과 / 온라인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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