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3월 11일] 유한양행 설립한 ‘유일한 박사’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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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3월 11일] 유한양행 설립한 ‘유일한 박사’ 타계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1.03.1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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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대한민국의 기업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회사업가. 유한양행과 유한대학교를 설립한 유일한(1895년 1월 15일 ~ 1971년 3월 11일) 박사가 타계한 날이다.

그에게는 197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 197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유 박사는 생전에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며 사회와 종업원의 것이다”며 “정성껏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봉사하고, 정직·성실하고 양심적인 인재를 양성·배출해야한다. 또한 기업의 이익은 첫째, 계속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창출하고 둘째, 정직하게 납세하며 셋째, 남은 것은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교육자로서 "자신의 전 재산을 교육하는 데에다가 기증하라"고 유언하고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대학교를 설립했다.

▲ 미국 유학

유일한 박사는 1894년 12월 13일 유기연과 김씨 사이의 9남매 중 장남으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박사의 부친 유기연은 장사에 남다른 소질이 있어 평양 시내에서 농산물 도매상과 재봉틀 대리점을 경영하여 재력을 쌓은 상인으로 일찍이 그는 숭실학교를 설립했던 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마펫(S. A. Maffet)에게 세례를 받았다.

부친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전투구와 러일전쟁을 목격하면서 국가가 망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따라 국권을 수호하고 자주 독립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선 민족의 실력 양성과 경제적 자립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해 미국에 아들을 유학시키기로 결심한다.

1909년 유 박사는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든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에 입학,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고 방학 때는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냈다.

고교시절 미식축구부에 활동을 했을 정도로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보유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미시간 대학교(University of Michigan)’에 입학한다.

대학생 시절 학비가 부족한 유 박사는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전기 변전소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고 했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서재필은 만세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를 소집한다.

유 박사는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고 회의가 끝난 뒤 바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도 참석한다.

▲ 청년 사업가로 변신

유일한 박사 가족들(좌측부터 유일한, 딸 유재라, 아들 유일선, 부인 호미리)
유일한 박사 가족들(좌측부터 유일한, 딸 유재라, 아들 유일선, 부인 호미리)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미시간 중앙철도회사와 세계적인 전기회사인 제너럴 일렉트릭사등에 취직했다가 1922년 대학 동창과 동업으로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식품회사(La Choy Food Product Inc)’를 설립한다.

이를 운영해 어느 정도의 사업자금이 마련되자 미국의 사업체와 재산을 정리, 귀국한 뒤 1926년 12월 ‘유한양행(柳韓洋行)’을 설립한다.

미국인들에게 한국의 문화와 풍물을 소개했던 그는 유한양행의 사업을 다각화해 의약품 생산과 함께 위생용품, 농기구, 염료 등을 수입했다.

1930년대에 들어 일제에 의해 만주침략(1931년 9월)과 중일전쟁(1937년 7월)이 도발되고 국내외 상황이 긴박하게 변화해 유 박사는 193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 체류하면서 수출선의 다변화와 유럽 및 중국 시장개척에 노력하는 한편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후 1941년 4월 해외 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하고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한 ‘해외한족대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창설하고 집행부 위원이 선임되어 독립운동자금 조성에 크게 기여한다.

▲ 유한양행 설립

유한대학교
유한대학교

1926년 종로2가에 유한양행을 설립한 그는 한민족의 건강유지에 필요한 결핵약과 1933년에 처음 개발한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혈청 등을 판매한다.

부인 호미리 여사도 중일전쟁으로 조선의 의약품 부족해 소아과 병원을 개업하고 저렴하게 환자들을 치료한다.

그는 유한양행을 경영할 때 항상 윤리경영을 실천했다.

그는 탈세하지 않고 모르핀을 팔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간부사원의 유혹을 “당장 회사에서 나가시오”'라는 꾸짖음으로 물리친 일화 등이 전해지고 있다.

1936년 유한양행은 한국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했다.

1946년 7월 미국에서 귀국한 그는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 활동과 1952년에는 고려공과기술학교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했다.

1969년 경영에서 은퇴해 전문경영인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했고 1971년에 타계했을 때 유언을 통해 사회 환원을 선언했다.

독실한 침례교 신자인 그는 자신의 재산에 대해 자신의 소유가 아닌 예수님이 맡기신 것이라고 믿고 1970년 유한재단을 설립해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공업전문대학’을 운영했다.

별세하기 전 그는 손녀의 학자금으로 쓰일 1만불을 제외한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기부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그가 살던 집은 겉은 붉은 벽돌로 내부는 목재로 지어졌으며, 현재 건물 소유주인 성공회대학교에서 신학연구소 사무실로 쓰고 있다.

현재는 ‘유한공업고등학교’와 경기도 부천시 괴안동 사이에 ‘유일한로’라는 이름이 붙여진 자동차 도로가 있다.

유일한 박사 동상

*출처: 위키백과 / 온라인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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