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2월 3일] 프랑스 파리 강화 회의 대표단 참석자 ‘여운홍’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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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2월 3일] 프랑스 파리 강화 회의 대표단 참석자 ‘여운홍’ 사망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1.02.03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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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약
여운형과 형제지간...일제 말기 친일 시국강연 글 기고

[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1973년 오늘 여운홍(1891년 9월 1일 ~ 1973년 2월 3일)이 사망한 날이다.

는 대한민국 정치가로 프랑스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했다. 경기도 양평 출생으로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독립운동가 여운형과 형제지간이다. 그의 호는 근농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여운홍은 1909년 중앙중학교를 거쳐 1911년 서울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1913년 3월 미국에 유학했다.

미국 감리교회 해리스 목사의 소개장을 통해 힘들게 여권을 얻은 그는 여권을 얻고, 논 열 마지기를 언더우드 목사에게 저당 잡히고 이자 없이 돈 600원을 빌려서 도미했다.

미국유학 전 여운홍과 그의 형 여운형은 안창호 선생의 연설에 감명 받어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1918년 오하이오 주의 우스터대학을 졸업한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했다.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한 그는 같은 해 프랑스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대표단으로 참석했다.

그는 또 1920년 미국의원단이 중국을 방문하자 임시정부의 교섭위원으로 활동했다. 1921년까지 상하이에 설립된 인성학교의 교장을 지낸 그는 그해 귀국해 1922년부터 1925년까지 보성전문학교의 영문학 교수로 활동하다 1927년부터 1939년까지는 미국에 본사를 둔 싱거 미싱 회사의 조선감독원을 지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1년 태평양 전쟁 이후 시국 강연 참석과 친일 논문 저술 등을 하며 변절했다.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내용의 강연을 여러 차례하고 잡지에도 친일의 글을 기고했었다.

1945년 8월 형 여운형이 준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한 그는 여운형, 김규식 등과 함께 좌우 합작 운동,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1947년 민족자주연맹의 중앙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한 그는 1948년 4월에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했다. 이후 귀환해 통일운동의 역량 결집과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목표로 결성된 통일독립촉진회의 중앙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기도 양평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대한국민당 류래완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을 탈출하지 못하였고 장건상과 함께 북한군의 감시를 받다 가까스로 탈출하여 납북은 면했지만 북한을 지지하는 국회의원 연판장에 서명한 것이 적발되어 몇 달간 의원직이 정지됐었다. 1952년경 자유당에 입당하여 선전 부장을 역임했다 .

1960년 제5대 참의원에 당선된 그는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의원자격을 상실했다.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자문위원과 고문을 지냈으며, 1973년 2월 3일 82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사망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의 친일 행적 때문에 사후 한국독립당 당원 김승학이 작성한 친일파 명단, 교육 부문에 수록됐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어 있다.

파리 강화회의의 임시정부 대표단(1920)(앞줄 여운홍,김규식 등)[사진= 국립중앙도서관]
파리 강화회의의 임시정부 대표단(1920)(앞줄 여운홍,김규식 등)[사진= 국립중앙도서관]

▲독립운동

1917년 미국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자, 한때 프린스턴 대학교의 총장이기도 했던 그를 만나고자 소개장을 얻어 찾아가려 했다.

대학 교수와 목사 몇 인의 소개장을 들고 1917년 11월 15일 백악관을 찾았으나 영어가 서투르던 그는 한참 만에 경호실을 통과하여 백악관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윌슨의 비서 그라스의 면담거절로 실패하고 되돌아왔다.

유학시절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약소민족의 비애를 호소했고, 1918년 11월 말 프린스턴에서의 짐을 정리하고 프린스턴 대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게 된다.

그해 하와이를 거쳐 1919년 2월 16일 귀국했다. 귀국 중에는 일본 도쿄를 경유, 당시 일본을 유학 중이던 김성수, 송진우, 윤치영 등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미국 교포들의 현황과 독립자금 모금 현황을 알려주었다.

도쿄의 우에노 공원에서는 형 여운형의 밀지를 들고 온 장덕수를 만나 그간의 행적을 접하기도 했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미국의 헐버트 박사와 함께 ‘독립청원서’를 작성해 프랑스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대표단으로 참석하게 된다.

▲저서

저서로는 ‘영문법’, ‘몽양 여운형(呂運亨)’ 등이 있다.

*출처: 위키 백과 / 다음 백과 / 온라인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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