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월 5일]독립운동가 ‘김상옥 열사‘...단신으로 수백명 일본경찰과 총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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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월 5일]독립운동가 ‘김상옥 열사‘...단신으로 수백명 일본경찰과 총격전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1.05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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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889년 오늘 일제 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당시 일제 경찰력의 중심부이자 독립운동가 검거와 탄압의 상징이었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서울 시내에서 일본 경찰과 홀로 총격전을 벌여 그들에게 두려움을 준 김상옥이 출생했다.

그는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일본 제품 배척 운동을 전개하였고, ‘혁신공보’를 발간해 독립사상을 계몽, 고취했다.

1923년 1월 22일 일본 경찰 4백여 명과 대치하다 총알이 떨어져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자결 순국했다.

한지 김상옥(1889.1.5-1923.1.22)
(사진제공=독립기념관)

▲국산품 장려와 독립운동

그는 서울 동대문 효제동에서 구한말 군관이었던 김귀현의 차남으로 출생했으나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여 빈한한 가정의 소년으로 성장한다.

1910년 미국 유학의 꿈을 품고 황성기독교 청년회관(YMCA) 부설 야간 영어반에 등록하여 낮에는 대장간에서 노동을, 밤에는 영어 공부를 하면서 국제정세와 서양문화에 안목을 넓혔다. 

1912년 동대문 밖 창신동에서 형 김춘옥, 동생 김춘원과 함께 영덕 철물 상회를 열었고, 1913년 대한광복회 결성에 참여한다. 1916년 5월에는 한훈, 유장열 등과 전남 보성군 조성 헌병대 기습작전에 참여하여 반민족 분자 2명을 처단하고 무기를 탈취했다.

1917년 영덕 철물점에서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일본 상품 배척 운동의 일환으로 말총 모자를 제조 판매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 직공이 50여 명이 될 정도로 번창했다. 농기구와 양말 그리고 장갑 등도 만들었다. 

그는 직공들을 위해 공인 조합을 만들고 일본어 사용 금지, 금주・금연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또 동업조합을 조직해 당시 대부분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 상권에 대항했다. 

그는 이종소, 임용호, 손정도 목사 등과 함께 백영사를 조직하여 사회계몽과 인재양성 사업을 전개했다.

1919년 4월 동대문 교회 안의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서 '혁신단'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혁신 공보’를 발간해 독립사상을 계몽하고 고취시켰다. 그러나 비밀 인쇄 장소가 발각되어 인쇄 책임자 서대순이 검거되고 자금난까지 겹쳐 ‘혁신 공보’를 더 발행할 수 없게 되었다. 

혁신단은 일제를 직접 공격하여 타격을 가하는 강력한 투쟁, 즉 조선 총독을 비롯한 총독부 고관과 친일파들을 처단하는 의열투쟁으로 방향을 재정립하고 암살단을 조직했다.

이 시기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에 파견된 길림 군정서 요원인 김동순은 김상옥 조직과 결합하고, 김상옥은 군자금을 지원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협의로 무기를 갖고 입국한 광복단 충청지구 결사 대장 한훈을 만나 무기와 폭탄을 확보한 암살단원들은 북한산 등지에서 사격을 비롯한 특공훈련에 돌입했다.

▲대한 남아의 기백

1920년 8월 24일 미국 상하의원단이 중국을 거쳐 내한한다는 소식을 접한 김상옥은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나오는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 및 일본 고관을 암살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거사 계획은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어 동지들은 체포되고 김상옥은 중국 선양으로 피신한다.

1922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시영, 이동휘, 조소앙, 김원봉 등은 1923년 1월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한 동경 행을 기회로 조선 총독과 일본 고관 암살 및 주요 관공서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계획을 세웠고 김상옥은 그해 12월 삼판통(현 후암동) 매부 고봉근의 집을 거사를 위한 은신처 겸 한당 서울 혁명 사령부의 본부로 삼았다.

1923년 1월 12일 밤 8시 10분 그는 거사 전에 폭탄의 성능을 확인하기 위해 독립운동가 탄압의 본거지인 종로경찰서를 향해 폭탄을 던져 종로 거리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종로경찰서에 수사본부가 설치되고 서울 전역에 비상 경계령이 내려졌으며 거리의 행인들은 곳곳에서 몸수색을 당했다.

결국 일본 경찰 정보망에 삼판통 은신 사실이 탐지되어 1월 17일 새벽 4시 종로경찰서 형사부장 다무라(田村)를 비롯한 일본 경찰 21명이 동원되어 그를 체포하려 했으나 김상옥은 총격을 가해 다무라를 처단하고 일본 군경들의 포위망을 뚫고 서울 시내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 은신했다.

이 집에 숨어 은밀하게 동지들과 접촉했으나 전우진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은신처가 발각됐다. 1월 22일 새벽 일본 군경 수백 명이 이혜수 집 주변을 4중으로 포위하자 김상옥은 양손에 권총을 쥐고 효제동 집들의 담을 넘나들면서 3시간여 동안이나 혼자서 일본 경찰에 대항해 총격전을 벌여 일본 경찰 16명을 사상케 했다.

그러나 총알이 다해 가자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일본 경찰은 두려움에 그의 죽음을 직접 확인하지 못하고 어머니 김점순을 불러 사망 여부를 확인하게 했다.

김상옥 의사의 장렬한 죽음이 알려지자 임시정부는 1923년 2월 17일 상하이의 삼일당에서 추도식을 거행하고, 3월 1일 자 ‘독립신문’에 그의 생애와 장렬한 서거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인 1948년 10월 6일 김상옥 열사기념사업협회(고문 김구, 이시영, 협회장 조소앙)가 창립되었다.

그의 공을 기리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1998년 5월 28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김상옥 열사 동상이 건립되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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