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1월13일] 나비 박사 석주명 탄생
상태바
[역사속의 오늘-11월13일] 나비 박사 석주명 탄생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0.11.13 14: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908년 11월 13일은 ‘한국의 파브르’라고 불리는 생물학자 석주명 박사가 태어난 날이다.

평양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그는 1921년 민족 교육의 온상으로 유명한 숭실고등보통학교와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했다.

이후 일본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 유학 때 지도교수로부터 나비 연구를 권유받은 그는 1931년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일본 동물학자들의 잘못된 나비 분류를 바로잡은 데 있는데, 이른바 ‘개체변이에 따른 분포곡선 이론’이 그 기반이 됐다.

석주명은 영국 왕립아시아협회 조선지부에서 발간한 A Synon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 〈조선산 접류 총목록〉(1940년)을 통해 한국의 나비는 248종이라고 바로잡았다.

▲ 초년시절

석주명 박사의 부친은 시내에 종업원이 100여 명에 이르는 요리집을 운영할 정도로 부유한 사업가였으며, 독립 운동을 지원할 만큼 민족의식이 뚜렷했다.

어머니는 당시에는 귀한 신식 물자인 타자기를 구해줄 정도로 자식 교육에 많은 열정을 보였다. 이러한 가정 환경은 석주명이 민족 문제와 학문 연구에 관심을 갖게 했다.

어릴 때부터 토끼, 비둘기와 같은 동물을 좋아해 집에서 길렀으며, 1921년 장로교 선교사 베어드가 세운 숭실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동맹휴학에 가담하여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로 학교를 옮겼으며, 다시 경상북도 대구 고등농림학교로 전학하였고 1927년에 졸업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최고의 농업 전문학교의 하나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에서 공부하고 1929년 학업을 마쳤다.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 졸업 후에는 송도중학교에서 생물 교사로 일하면서 한반도의 나비에 대해서 연구했다.

▲ 본격적인 나비 연구 돌입

그러나 송도고보에서 교편을 잡은 후, 나비를 연구하려던 석주명에게는 지도해 줄 스승도, 참고할 문헌조차도 없었기에 직접 나서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제자들이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갈 땐 나비채집을 숙제로 내줬고, 어쩌다 희귀한 나비를 잡아 온 학생에게 높은 점수를 줬다.

십 년 후 석주명이 송도고보를 떠날 때 그의 연구실에 보관 중인 나비표본은 60만 마리였다고 한다.

그 다음 그가 시작한 작업은 분류학적 연구였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생물학 연구는 일본 학자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단지 새로운 종을 발견해 연구업적을 쌓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오로지 종의 수를 늘리는 계량적 연구에만 치중했다.

당시 석주명은 배추흰나비 16만여 마리의 무늬를 비교했으며, 그동안 일본 학자들의 관행을 바로잡기 시작했다.

▲ 독보적인 한국 나비의 분류체계

1931년 석주명은 마쓰무라의 ‘일본곤충대도감’을 접하고 숱한 오류를 발견했다. 그는 자신의 방대한 나비표본을 바탕으로 한국의 나비를 새롭게 쓰기로 결심한다.

마쓰무라 연구의 가장 큰 허점은 적은 표본으로 나비의 종을 분류했기 때문에 개체변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같은 종의 나비를 별종으로 분류해 놓은 것이었다.

석주명은 생물학의 입구는 분류학이며, 이 분류학의 토대는 개체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수많은 종을 모아 평균을 결정하고 개체변이의 범위를 밝혀 동종이명을 삭제하는 분류학 연구에 착수했다.

1933년 석주명은 조선박물학회잡지에 은점표범나비의 3개 아종명이 동종이명임을 발표하면서 한국 나비의 계보를 독자적으로 정립해 갔다.

석주명은 학자 인생 동안 무려 75만 개체를 표본으로 잘못된 한국 나비의 아종·변종을 추려내고 동종이명 844개를 제거했다.

▲ 이후의 업적과 쓸쓸한 최후

석주명 필생의 역작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에서 그는 한국산 나비 255종의 학명을 확정짓고, 일부 미기록종과 함께 동종이명 212개를 제거, 한국산 나비의 총목록을 완성했다.

1940년에 낸 나비에 관한 그의 저서는 현재 사이트 영국왕립학회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또 이로 인해 석주명은 세계 30여 명의 학자에게만 문을 연 만국 인시류 학회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한편 1943년 제주도에 파견 근무를 가게 된 그는 6권의 제주도총서를 발간했다. 이 중 ‘제주방언집’은 제주도 사투리뿐 아니라 한국 고어(古語)와 언어 역사를 규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해방 후에도 석주명은 다양한 연구에 매달렸으나 한국 전쟁 도중인 1950년 9월 말 서울과학관의 보존 중이던 그의 나비 표본이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석주명 자신도 1950년 10월 6일 조선인민군으로 오인을 받아 총격으로 41세에 세상을 떠난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오”였다고 한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