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0월20일]‘항일 무장투쟁 이끈 독립운동가‘...이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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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0월20일]‘항일 무장투쟁 이끈 독립운동가‘...이범석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0.10.20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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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 1900년 오늘 일제 강점기에 항일 무장 투쟁을 이끈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이범석이 출생했다.

그는 북로 군정서를 비롯한 여러 독립군 부대에서 교관으로 활동했으며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 대첩에 참여해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1940년에 창설한 한국광복군의 특수부대 OSS 대장에 임명되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군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는 합동 작전을 펼쳤다. 

1948년 정부 수립과 더불어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겸임하였고 그 이후 여러 정치적 역할을 역임하다 1972년 5월 11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1940년대 광복군시절
1940년대 광복군시절

▲대한민국 국방건설의 아버지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의 17대 후손인 그는 어린시절 한성 외국어학교 출신인 외삼촌 이태승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는 1915년 경성 보통 학교 3학년에 재학 중 여운형을 만나 상하이로 건너간다.

중국 운남 강무 학교를 수석 졸업 후 중국군 기병 부대에서 수습 사관으로 복무하던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19년 7월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는 이시영의 추천장을 가지고 1919년 10월 신흥 무관학교에 도착,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지청천, 김광서와 함께 신흥 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서로군정서 교성대 대장도 맡아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다했다.

1920년 3월 그는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의 부름을 받아 북로군정서의 연성 대장으로 활약하다 그해 10월 청산리대첩에서 제2 제대 지휘관으로 참여, 일본군에게 크게 승리한다. 청산리 전투는 항일 무장 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전투였으며, 일본은 그 보복으로 간도 학살 사건의 만행을 저지른다. 

이후 소련에 진출해 소련 합동 민족 군 연해주 지역 지휘관으로 소련의 혁명전쟁에 참가했으나 소련의 대일정책에 불만을 품고 다시 북만주로 돌아와 김규식 등과 함께 고려혁명군 결사대를 조직하여 기병대장으로 활동했다.

1940년 9월 17일 중국 국민정부의 후원 아래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이범석은 여기에 참모장으로 참여했으며, 이후 직접 독립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제2 지대장으로 자원했다.

또한 미국 전략 정보국(OSS)과 합작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수행할 계획을 세운 그는 미국 전략 정보국의 지원 아래 한국광복군을 훈련한 뒤, 잠수함이나 항공기로 국내에 투입하여 공작 거점을 확보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독수리 계획을 추진했다.

이 계획에 따라 선발된 38명의 한국광복군 요원들이 OSS의 교육 훈련을 수료하고 국내 침투를 기다렸지만, 일제의 항복으로 실현되지 못했고, 일제의 항복 직후 그는 곧바로 OSS와 연계한 국내 정진대 파견을 추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그는 1946년 6월 3일 500여 명의 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인천항을 통해 귀국했다. 귀국 직후 이범석은 좌우 진영의 극한 대립을 목격하고 1946년 10월 '민족 지상 국가 지상'을 내세운 민족청년단을 결성하여 해방 공간에서 민족 국가 건설에 힘썼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으로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국군 창설과 육성에 크게 공헌하였디. 이후 1950년 주중대사, 1952년 자유당 부당수 및 내무부장관 등을 역임한 후 1972년 5월 11일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했고, 2016년 11월 8일에 진수된 해군 손원일급 잠수함의 8번 함이 '이범석'함으로 명명되었다.

 

*출처: 다음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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