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0월29일] 나치 선동가 '괴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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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0월29일] 나치 선동가 '괴벨스'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1.10.29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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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요제프 괴벨스
파울 요제프 괴벨스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896년 오늘은 나치 독일에서 국가대중계몽선전장관의 자리에 앉아 나치 선전 및 미화를 책임졌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태어난 날이다.

히틀러의 최측근 역할을 했던 그는 1945년 아돌프 히틀러가 죽은 후 하루 뒤에 포위된 벙커 안에서 아내와 6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동반 자살했다.

나치당의 두뇌라고 불릴 만큼 나치당의 지식인이었던 그는 제복 대신 양복을 주로 입는 등 선전 방법에 능숙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유창한 말솜씨는 사람들을 선전하다 못해 광신적인 신도들로 만드는 능력을 발휘했다.

괴벨스는 라디오와 TV를 통해 정치 선전을 했었다. 정기적인 TV방송을 통한 선전은 세계 최초로, 그의 방송을 들은 당시 독일 국민들은 패전의 상황에서도 승리를 확신했다고 한다.

▲ 생애 초기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라이트에서 아버지 프리츠 괴벨스와 어머니 카나타리 오덴하우젠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는 형들과 여동생 마리아와 자랐다.

괴벨스는 어렸을 때 폐렴을 앓아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병약한 신체를 가졌고 그러던 1901년 4세이던 때 골수염에 걸려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고 장애를 얻게 된다.

가족들은 그를 치료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수술 실패로 평생 장애를 갖게 됐고 이는 괴벨스를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만든다.

하지만 신체적 결함을 학업능력으로 극복하려 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1908년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괴벨스는 상급 학교에서도 최상의 성적을 거뒀고,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여러 가지 도움을 청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는 그 과정에서 우월감을 느꼈다고 한다.

▲ 1차 대전과 대학 시절

1914년 1차 세계대전을 맞은 그는 조국을 위해 전선에서 싸우기를 원해 1년 자원 복무 능력 증명서를 마련해 두었다.

다만 증명서는 효력이 없게 됐고 그는 전투원으로 싸우는 대신 대체 복무를 하게 된다.

1917년 3월 전쟁 중 괴벨스는 아비투어 시험에 합격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는데 졸업성적과 독일어 실력이 최고였기 때문에 졸업사를 낭독하게 됐다.

4월 괴벨스는 본·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진학한다. 같은 해 6월에 소집명령을 받고 라이트의 조국구호사업회 행정병으로 소집됐으나 상관들은 외모를 보고 그를 집을 돌려보냈다.

대학에 복학한 그는 지역 신부의 추천으로 가톨릭 재단의 장학금을 받게 된다. 그러나 곧 독일의 패전 소식이 들려오자 신앙을 버리기에 이른다.

▲ 선전 활동의 시작

1922년부터 그는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을 관심 있게 보게 되었고 3년 후인 1925년 나치에 입당했다.

그해 7월 11일 바이마르에서 열리는 회의 전날 괴벨스는 처음으로 히틀러와 만나게 되는데 그 후로 그는 더 히틀러를 신봉하게 됐다.

나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괴벨스는 1928년 국회의원, 1929년 당 선전 부장으로서, 새로운 선전 수단을 구사하고 교묘한 선동 정치로 1930년대 당세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1933년 나치스가 정권을 잡자, 국민 계몽 선전부 장관·문화회의소 총재로서 문화면을 완전히 통제하고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였다.

독일의 폴란드 침략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괴벨스는 국민들에게 분노를 심어 주기 위해 폴란드가 폴란드의 독일소수 민족들에게 잔혹한 행위들을 한다고 보도하도록 했다.

이후 독일 잠수함 U-47이 영국 해군의 모항에 잠입해 전함 로열 오크호를 격침하자 괴벨스는 처칠이 시한폭탄을 이용해 배를 침몰시키려 했다는 등의 거짓 주장을 퍼뜨린다.

▲ 프로파간다, 그리고 죽음

1940년대 초부터 괴벨스는 국가를 총력전 상태에 돌입시키도록 히틀러를 부추겼으며, 관련 선동의 선봉에 섰다.

특히 1943년 2월 베를린 슈포르트팔라스트에서 사회 고위층들을 상대로 행한 총력전 연설은 후대에 그의 강렬한 프로파간다의 대표적인 예시로서 들어진다.

프로파간다란 어떤 주의나 주장 등을 대중에게 널리 설명하여 이해와 동의를 얻으려는 활동을 말하는 것으로 주로 정치적 선전을 이르는 말이다.

1945년 히틀러가 자살한 후 나치의 총리에 올랐으나, 이튿날 총리 관저의 대피호에서 6명의 아이들을 모르핀과 청산가리로 살해한 뒤 아내 마그다 괴벨스와 권총으로 동반자살했다.

전쟁 후에 남은 유일한 가족은 북미에서 전쟁포로로 잡혀 있던 의붓아들 하랄트 크반트로, 그는 공군 중위로 이탈리아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부상을 당하고 포로 상태여서 죽음을 면했다.

종전 이후 크반트는 사업가로 활동하다 196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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