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1월2일]국군 군번 1번... ‘이형근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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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1월2일]국군 군번 1번... ‘이형근 장군'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11.02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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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920년 오늘 국군 초기 창군의 주역이자 국군의 상징인 ‘군번 1번(10001)’의 주인공으로 6ㆍ25 전쟁 당시의 10대 미스터리를 제기한 이형근이 출생했다.

그는 1951년 9월 휴전 회담 당시 한국 측 대표로 그리고 백선엽, 정일권과 함께 1950년대 군 주축 세력으로 활약하다 1959년 8월 대장으로 예편하여 재향군인회 회장과 주필리핀 특명전권대사를 거쳐 주영(駐英) 대사를 지냈다.

이근형[출처=e뮤지엄]
이형근[출처=e뮤지엄]

▲군번 1번            

이형근은 충청남도 공주에서 출생하여 김천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초대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의 사위이다.

1942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56기로 졸업한 후 일본군 포병 대위로 복무 중 태평양 전쟁 종전을 맞았으며 광복 후인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 신청을 하였지만, 뛰어난 영어 능력으로 U.N과 GHQ로부터 면제를 받았다.

그는 국군 군번 제1번으로 유명한데 당시 군번은 유엔군사령부에서 각국 참모들의 의견들을 받아들여 엄격히 정해진 것으로 최고사령관의 1번을 의미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군번 1번이 되고 싶었던 제2대와 4대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채병덕과 군번으로 인한 갈등 때문에 국군 탄생과 동시에 파벌이 생겼다.

군사 영어 학교 시험 성적으로 결정했다는 이형근의 말과 장인의 뒷배경으로 받았다는 채병덕의 말이 상반되었으며 사실 김홍일이나 김석원 같은 원로가 군번 1번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당대에도 논란이 많았다.

그는 한국 육군 사상 최초로 대위로 임관한 후 남조선 국방경비대 제2연대장 그리고 1946년 5월에 초대 조선 경비 사관학교 교장을 맡았고, 잠시 남조선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대리를 겸했다. 1948년 통위부 참모총장이 되어 한국군 최초로 미국의 군사시설을 시찰했고 1949년 6월에 제8사단장을 맡았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후방인 육군 제2사단장에 임명된 이후 육군 제3군단장과 1951년 8월에는 육군본부 교육 총장을 맡았으며, 그해 9월에 초대 휴전회담 대표로 참여했다. 한국군이 북진을 계속하던 1952년 1월에 육군 제1군단장에 임명되어 유명한 “351고지 전투”와 휴전 당시 동부 휴전선을 38선보다 북쪽으로 올려놓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또한 1952년 12월 그가 제1군단장으로 근무할 당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방한하여 6ㆍ25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원자탄을 사용해야 한다는 뜻을 내비치자, 그는 “전쟁이 빨리 끝나는 것은 좋지만 남북한 모두가 같이 망한다”라고 말하면서, 원자 폭탄 사용을 끝까지 반대했다.

진급을 거듭한 끝에, 종전 후인 1954년 2월 14일 정일권 장군과 동시에 사성장군이 되어 초대 대장인 백선엽 장군의 뒤를 이어 두 번째의 대장이 되었으며 1954년 2월 초대 합동참모총장과 1956년 6월 제9대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1959년 8월 대장으로 예편하면서 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명예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고 전역 직후 당시 장면(張勉) 정권 등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에게 입각을 권유했으나 군인이 정치에 관여해서 안 된다는 신조로 입각을 거절했다.

이후 영국ㆍ스웨덴ㆍ노르웨이ㆍ덴마크 대사를 역임했고 1980년 국가 보위 입법회의 의원, 1981년 국정 자문위원과 반공연맹 고문, 1989년 국토통일 고문 등을 맡았다. 2002년 1월 13일 세상을 떠난 이형근은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선정되었다.

 

*출처: 다음 백과 /나무위키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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