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0월 21일] 구한말 의병장 ‘허위’
상태바
[역사속의 오늘-10월 21일] 구한말 의병장 ‘허위’
  • 여운균 기자
  • 승인 2021.10.21 13: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디어인천신문 여운균 기자] 오늘은 구한말 경북 선산의 대지주 한학자 집안 출신으로 경북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정부 관료로 항일투쟁과 한일합방후 전국 의병연합대의 의병장을 맡아 항쟁한 ‘허위(許蔿, 1854년 4월 1일~1908년 10월 21일)’ 선생이 순국한 날이다.

그의 호는 왕산(旺山)으로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는 허위 선생에 대해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盡忠竭力) 용맹의 기상이 있었던들 오늘과 같은 국욕(國辱)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며 “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허위는 관계(官界)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고 평(評)했다.

▲ 출생과 성장

왕산 '허위' 초상화
왕산 '허위' 초상화

허위 선생은 1854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에서 출생했는데 부친은 진사인 허조이며 모친은 진성 이씨로 위로 세 분의 형님이 있었다.

그의 맏형 ‘허훈’은 구한말 거유로 당대에 문명을 크게 떨친 대학자이자 의병 운동가였고 셋째 형 ‘허겸’도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투사였다.

선생의 가문은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이름 높은 학자 집안으로 어려서부터 가학(家學)을 이어받았고 작은아버지와 20세 위인 맏형 허훈으로부터 학문을 수학했다.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이 전국을 휩쓸게 되자 동학 세력이 특히 강성하던 경상도 선산과 상주 지역에서 선생의 일가는 일시 화란(禍亂)을 피해 진보로 이사를 했다.

그가 구국 대열에 동참하는 계기는 1896년 전기의병 때로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반포로 인해 전국 각처에서 항일 의병이 연이어 일어난 ‘을미의병’이다.

그는 고향에서 이기찬과 이은찬, 조동호, 이기하 등 인근의 지사들과 협의해 의병을 모아 결의해 1896년 3월 26일 김천 읍내에 들어가서 수백명의 장정들을 모아놓고 항일의병의 기치를 들어 이기찬을 의병대장에 추대하고 그는 참모장이 되어 활동했다.

▲ 정부 관료로 항일투쟁

그는 1899년 신기선의 천거로 대한제국에 성균관 학자(박사), 주차일본공사수원, 중추원의관, 평리원수반판사를 거친 후 1904년 8월에는 평리원서리재판장(현재,대법원장서리)에 임명된다.

그는 당시 언론인이자 개신 유학자인 장지연과 교류해 신학문에 많은 관심을 가져 ‘사상 전환’을 해 1904년 8월 의정부참찬로 근무 시 정부에 학교 건립, 철도와 전기 증설, 노비 해방, 은행 설치 등을 주장한다.

1904년 ‘한일의정서’가 강제 체결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선생은 이상천, 박규병 등 관료 동지들과 함께 전국에 ‘배일통문’을 돌려 일제 침략을 규탄하고 전국민의 분발을 촉구한다.

당시 정부 관료 중 그 누구도 일제에 항의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그는 주동이 되어 항변했고 1905년 1월 항일활동에 빌미가 되어 일제 헌병대에 구금된 후 며칠 후 관료직을 사임하고 석방된다.

이후, 비서원승에 발탁 되었지만 일제는 최익현, 김학진 등과 함께 3월 11일 다시 구금하고 항일투쟁을 중단하라는 압박을 가하고 강제로 구금시키다가 7월 13일 귀향 조치한다.

▲ 연합의병대 의병장 활동

'허위' 선생의 수묵집
'허위' 선생의 수묵집

그는 귀향 후 지리산 삼도봉 밑 지례 두대동에서 일제 관헌의 감시를 받으며 은거하던 중 1905년 11월 ‘을사조약’ 강제 체결 소식을 듣게 된다.

이때부터 그는 경상, 전라, 강원, 경기도 각지를 돌며 곽종석과 이학균, 유인석 등 의병을 일으키고 영천의 유명한 의병장 정환직에게는 2만냥을 주선해 준다.

그는 이어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전국에 흩어진 의병부대들이 양주에 집결해 서울 진공을 노렸을 때 의병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삼아 출범한 의병 연합군 ‘13도 창의군’에서 진동창의대장을 맡는다.

하지만 총대장인 이인영의 부친 타계로 문경으로 급거 귀향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서울 진공 계획 정보가 누설되어 허위의 부대는 서울 근교까지 진군하지만 패퇴하고 만다.

이후 조인환, 권준 등과 연합해 계속 유격전을 벌이며 계속 저항하고 거듭되는 여러 회유책에도 굽히지 않고 이강년, 유인석, 박정빈 등과 함께 결사 항전을 주창한 강경파로 활동한다.

그는 결국 1908년 6월 11일 양평 유동골짜기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고 서울로 압송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투옥된 뒤 사형을 선고받고 1908년 10월 2일 교수형으로 55세를 일기로 순국한다.

현재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왕산로는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며, 1962년 정부에서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하고 현재 경북 구미시에는 ‘왕산허위선생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출처: 위키백과 / 독립기념관 / 온라인 커뮤니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