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10월 20일] 대한독립군단 총재 독립투사 ‘이범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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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10월 20일] 대한독립군단 총재 독립투사 ‘이범윤‘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1.10.20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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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이범윤(1856년 12월 29일 ~ 1940년 10월 20일)은 대한제국 변계경무서 예하 ‘북변간도관리사’ 직책을 지낸 구한말 시대 복벽주의 성향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전주이다. 오늘은 그가 사망한 81주기이다.

대한독립군 총재 이범윤
대한독립군단 총재 이범윤

▲생애

이범윤은 경기도 고양에서 출생해 한때 경기도 양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훗날 한성부에서 성장했다. 조선 말기 무위대장 무관 출신인 이경하의 아들이며 구한말의 정치가 겸 외교관을 지낸 이범진의 6촌 동생이다. 또한 구한말의 외교관을 지낸 이위종이 그의 숙부이다.

▲북변간도관리사

그는 1881년 청나라가 간도 지방을 개간한다는 명목으로 조선 농민을 추방하려 하자 간도의 조선인 보호를 위해 1902년 6월 간도시찰원으로 파견되었으며 1903년 10월에는 간도관리사가 됐다.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에 거주하는 조선 농민들을 순찰·위로하고 호구조사를 실시해 1만 3,000여 명을 편적시키고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에 병력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으나 정부가 허락하지 않자 의병을 모집하고 '사포대'를 조직해 군사훈련을 시키며 모아산과 마안산, 두도구 등에 병영을 설치했다.

10호를 1통, 10통을 1촌으로 하는 행정체계를 수립하고 도민에게 세금을 징수해 군대유지비를 충당했으며 청나라에 납세할 의무가 없음을 선언했다.

▲항일의병 활동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고종의 명령을 받아 1천명 규모의 '충의대'를 조직해 함경도 국경지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아니시모프 장군 휘하의 러시아군을 도왔다. 이에 러시아는 러일전쟁 당시의 공로를 인정하고 ‘신성안나 3등 훈장’을 수여했다. 또한 한인의 지위는 향상되었고 청국의 조세징수에서 벗어나게 됐다. 그의 부대는 연해주 최초의 항일의병부대의 주축이었다. 그러나 1905년 청국측의 강력한 철수 요구를 받은 정부로부터 소환명령이 내려졌으나, 소환에 응하지 않고 청국령을 떠나 노령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겼다. 노령의 노키에프스크에서 부하들의 생계문제를 해결하면서 '창의회'를 조직해 부대를 재정비하였다. 노령에는 이미 많은 지도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범윤은 '동의회'에 부총장이 되었다.

노령의 한인사회의 지도자인 최재형이 노령지역으로 이동한 이범윤과 그 휘하 의병들에 대한 후원에 나섰다. 최재형은 의병들에게 연해주 각 지 한인들의 의복과 식량을 제공할 것을 요청하는 신임장을 제공했으며 1907년 국내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최재형과 이범윤은 각지를 순회하고 동포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며 향후 의병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집했다.

▲독립 운동

이범윤은 '동의회'가 일시 해산되자 이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의병부대를 정비하기 위해 최재형·이위종에게서 자금을 지원받아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의회’를 조직하고 총재가 됐다.

그는 국내의 의병전쟁이 함경도 일대까지 확대되자 최재형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3,000여 명의 의병부대를 편성했다. 러시아의 퇴역장교들로부터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5연발총·14연발총 등으로 무장하고 제복도 러시아식의 군복 차림으로 통일했다.

1908년 7~10월에 걸쳐 러시아와 만주 국경에 위치한 합십마구에 전초기지를 두고 100명 내외의 소부대를 편성해 동간도, 두만강 하류, 동해안 방면으로 나누어 일본군 수비대의 경비가 약한 곳을 골라 기습적으로 도강·진공하며 일본군을 공격했다. 안중근과 엄의섭 등이 참가한 연추의병부대는 러시아령에 머물면서 여러 차례 국내에 진입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이후 그는 유인석의 ‘13도의군’에 참가했다. 의병장 출신들이 중심이 된 ‘13도의군’에는 안창호와 이갑 등 계몽 운동 계열의 인사들도 참가하여 연합조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909년 5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인석과 회합하여 항일전쟁에서 서로 협조하기로 하고 그해 8월 이범윤은 ‘성명회’를 조직했으며, 8월 23일 합병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인석 명의의 합병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선언서를 각국 정부에 보냈다. 러시아와 만주 동포들에게는 합병반대를 위해 무장투쟁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그해 9월 그와 이상설을 비롯한 성명회와 13도의군의 간부 20여 명을 체포·수감하고 한인들의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이르쿠츠크로 강제 추방했다.

이범윤은 추방이후 1911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인석·최재형·최봉준·이상설·홍범도 등과 함께 ‘권민회’를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으며, 1912년 6월 그의 부대는 국내진공작전을 벌여 회령 등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했다. 지속적인 러시아 정부의 간섭으로 러시아령에서의 항일운동이 힘들어지자 이범윤은 지린 방면으로 옮겨가 독립활동을 펼쳤다.

1918년 신채호·김동삼·박용만 등 38명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해 한일합병의 무효와 무력 대항을 선언했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진학신·최우익·김청봉 등과 함께 동북만주 일대의 의병부대를 통합해 ‘의군부’를 조직하고 총재가 됐다.

그해 7월에는 서일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동맹을 체결해 합동무장투쟁을 벌였다. 이에 1920년에는 김성극·홍두식 등이 조직한 복벽주의 독립군 단체인 '대한광복단'의 단장이 됐다.

청산리 전투 후 서일·홍범도 등 각 독립군부대의 지도자들이 러시아령 연해주로 건너가 새로운 항일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1920년 12월 밀산 에서 ‘전만군사통일체’로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자 그가 이끄는 ‘의군부’도 가맹했으며, 러시아령으로 들어갔던 '대한독립군단'이 1921년 6월 자유시참변을 당한 뒤 1922년 8월 재조직되자 서일의 뒤를 이어 총재로 추대됐다.

1924년 9월 문창범·지청천·이동휘 등과 함께 ‘군사연합회의준비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으며, 1925년 3월 10일 지린성, 닝안현에서 ‘신민부’가 창립되자 참의원장으로 취임하고, 신민부에서 설립한 성동무관학교의 고문으로 활동 했다.

1937년 양아들 이억종이 북만주에서 비밀리에 국내로 모셔왔고 1940년 10월 20일 노환으로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이범윤은 권업신문을 발행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출처: 위키 백과 / 다음 백과 /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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