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10월 13일] 구한말 의병장 ‘이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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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10월 13일] 구한말 의병장 ‘이강년‘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1.10.13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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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이강년(1859년 2월 2일(1858년 음력 12월 30일) ~ 1908년 10월 13일)은 조선 후기 동학농민운동 때 문경 동학군의 지휘관이자 을미사변 이후 문경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전주, 자는 낙인, 호는 운강이다 오늘은 그가 사망한 날이다.

의병장 이강년
의병장 이강년

▲출생

경상도 문경군 가은면에서 아버지 이기태, 어머니 의령 남씨의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3대 왕 태종임금의 둘째아들인 효령대군 이보의 18대손이다. 1880년(고종17년) 무과에 급제하여 종 6품 행용양위부사과에 올라 선전관이 되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 때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항일무장 활동

이강년은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때 문경 동학군의 지휘관으로 일본군, 탐관오리와 싸웠으며,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1월 11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관찰사 김석중과 순검 이호윤, 김인담 등 3명을 체포해 농암장터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효수했다.

그는 제천의 유인석을 찾아가 사제의 의를 맺고, 유인석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서 문경·평천·조령 등지에서 활약했다. 이해 4월에 장기렴이 거느린 관군과 제천에서 싸워 패전한 후, 유인석이 강원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랴오둥으로 가고자 했으나 영월에서 더 전진하지 못하고 소백산에 들어가 7월에 의병을 해산했다. 이후 유인석이 랴오둥으로 가자 그도 잠시 랴오둥으로 건너갔다가 돌아와서 단양 금채동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1907년 일본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되어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물러나고 한일신협약으로 한국군대가 해산 당하자 영춘에서 더 큰 규모의 의병부대를 일으켰다.

그해 7월 7일 제천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했으며, 9월 16일에는 싸릿재, 9월 27일에는 죽령, 10월 5일에는 단양 고리평, 10월 23일에는 풍기 백자동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강원도 이인영 의병부대 및 경기도 허위 의병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해 풍기·문경·단양·연풍·영월·죽령 일대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기도 했다. 이후 이인영으로부터 경기도로 집결하라는 통문을 받고 경기도 건천으로 진출해 1908년 7월까지 충청도·강원도·경기도 일대에서 약 5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치열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같은 해 11월 경기도 양주에 모인 의병장들이 ‘13도창의대진소‘를 성립한 뒤 관동창의대장 이인영을 13도창의총대장으로 추대하고 각 도별로 진명을 내려 지휘체계를 정비할 때, 호서창의대장으로 임명됐다.

1908년 2월 17일 경기도 용소동전투를 시작으로 2월 26일 갈기동전투, 3월 12일 백담사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후에도 강원도 인제 부근에서 일본군의 포위 공격망을 돌파·항전했다. 같은해 4월경 소백산·일월산 일대로 활동무대를 옮겨 일본군과 계속 항전하며 변학기,성익현, 김상태, 정경태, 백남규, 정연철 등의 의병장과 제휴해 안동 서벽전투에서 매복 작전으로 크게 승리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08년 6월 4일 단양 금수산 전투에서 발목에 총탄을 맞아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어 7월 8일 서울의 일본군 헌병사령부로 압송되고, 평리원으로 옮겨 9월 22일에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908년 10월 13일 51세 일기로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순국 직전 그는 큰아들 이승재에게는 “네 아비는 평생에 혈충을 품어 나라를 위해 죽고자 했다. 이제 뜻대로 되었으니 무슨 여한이 있으랴. 너는 놀라지 말고 정신을 차려 동생과 함께 나 죽은 뒤 삼일 안으로 박장토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전국 의병에게는 “강년은 양심이 격동함을 참을 수 없어 병신년(1896년) 이래로 13년간 두 번 의기를 들고 일어나 30여 회전에서 적추 백여 명을 참수했다. 이 몸은 존화양이의 대의에 죽는 것이니, ‘하루를 더하더라도 그치는 것보다 낫다’는 것도 이제는 그만이 되었다. 동지들에게 바라는 것은 적세 성하다고 해서 본의를 어기지 마시고 더욱 큰 의리로 매진해 광명한 날을 기다리시라.”라고 각각 유언을 남겼다.

이강년 동상
이강년 동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그의 저서로는 ‘운강문집’과 그 제자와 의병시절의 부하들에 의해 엮어진 ‘운강선생창의일록’ 등이 있다.

순국 후 유언에 따라 유해는 서울 방배동의 효령대군 묘소 옆에 임시로 묻어두었던 것을 비밀리에 제천으로 임시 권장한 뒤 1910년 경북 상주의 화북면 입석리로 이장했다.

1962년 가은역 앞에 ‘해동의사운강이선생강년지비’가 건립되었다가, 2002년 문경의 도태리 생가지 부근에 ‘운강이강년기념관’이 건립되자 경내로 이 비를 이전 설치했다. 1967년 8월에는 갈평전투 승전 60주년 기념으로 지역 주민들의 발의로 전적지 갈평에 ‘창의대장도체찰사운강이공전승기념비’를 건립했다.

이강년은 구한말 20여년에 걸친 의병전쟁 시기에 민긍호, 홍범도 등과 함께 가장 전투력이 뛰어난 부대를 거느렸던, 의병전쟁을 선도한 대표적인 의병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출처: 위키 백과 / 다음 백과 /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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