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10월12일]'봉오동전투' 승리로 이끈 항일독립군 대장 ‘홍범도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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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10월12일]'봉오동전투' 승리로 이끈 항일독립군 대장 ‘홍범도 장군'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10.12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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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868년 오늘(음력 8월 27일) 항일 독립군 사상 최대 승전을 거둔 ‘봉오동 전투’을 이끌고 ‘청산리 독립전쟁’에서 김좌진 장군과 함께 대승을 거둔 홍범도 장군이 출생했다.

대한독립군의 총사령관으로 민족주의와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하는 철저한 무장투쟁노선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그는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해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부총재로 활동했으며 고려 혁명 군관학교를 설립했다.

홍범도 장군[출처=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홍범도 장군[출처=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산포수에서 의병대장으로

평안남도 양덕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부근 지주 집의 머슴살이로 생활하는 등 매우 어렵게 성장했다. 1883년 평양의 친군서영(親軍西營)에 입대해 사격술을 배웠으나 장교들의 부정과 비리 그리고 사병들에 대한 굴욕적인 학대에 실망하여 군대 생활을 그만둔다.

이후 광산 노동자를 거쳐 1893년 삼수의 직업적 산포수대에 들어가 산짐승 사냥에 종사하기 시작하여 1907년까지 14년간 삼수・갑산・풍산・북청 일대에서 포수 생활을 하면서 단란한 가정생활을 이루었다.

일제는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고 9월 7일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해 민간인이 가지고 있는 화승총과 사냥총까지 모두 회수했다. 이에 홍범도는 그해 11월 차도선ㆍ태양욱 등과 함께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산포수 및 청년들 200여 명을 규합, 함경남도 북청의 후치령을 근거지로 의병을 일으켜 갑산ㆍ삼수ㆍ혜산ㆍ풍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을 격파했다.

홍범도의 의병부대는 막강한 전투력를 가진 부대로 일본군과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자 일본군은 군사 행동만으로는 홍범도 부대를 섬멸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한국 관리와 일본군을 보내 산포수 부대원의 가족들에게 협박과 회유 등 선무공작을 맹렬히 전개하여 의병대 내부의 분열을 꾀했다. 

그 결과 차도선이 직계 부하들을 데리고 귀순하고 태양욱은 잡혀 고문 끝에 처형당함으로써 홍범도 의병 부대의 전력이 약화됐으나 이에 굴하지 않은 홍범도는 남은 의병대를 독려해 또다시 일본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1909년 일본은 대한제국 병탄을 목전에 두고 대대적인 의병 탄압에 나섰고, 탄약마저 고갈되어 더는 국내에서 싸우기가 어렵게 되자 그는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전력했고 다음 해 부장 박영신이 이끄는 선발대가 국내로 진입하여 함북 경원의 수비대를 습격하여 섬멸시켰다.

이후 탄약 고갈로 의병 활동이 거의 불가능해지자, 의병부대는 해산되었고, 1911년 홍범도는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최재형 등과 ‘권업회’를 조직하여 사찰 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신문 발간 사업, 민족교육 사업, 그리고 한인의 경제력 향상에 노력했으며 항일 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회원들 모두가 노동하면서 그 노임의 일부를 독립전쟁을 위한 군자금으로 비축하는 ‘노동회’를 1912년에 조직하고 회장으로서 그 또한 연해주 지역의 항구와 금광 등을 전전하며 노동하여 군자금을 조달하여 이 자금으로 소총과 탄약을 사들여 국내 진공의 기회를 엿보았다.

1919년 3・1 운동을 무장 투쟁으로 발전 시켜 북간도에서 의병 출신들과 한국 청년 및 산포수 약 200명을 모아 대한독립군을 창설하여 혜산진 일본군 수비대를 격퇴하고 함경남도 갑산군의 일제 통치기관을 습격했으며 평안북도 강계 만포진을 점령한 후 자성군으로 진출하여 일본군 70명을 전멸시키는 등 국내 진입 작전을 단행했다.

▲봉오동 전투와 자유시 참변

간도의 교민 단체인 대한 국민회의 산하로 들어간 대한독립군은 국민회의 직할 군대인 안무가 지휘하는 국민회군의 지원을 받아 무기와 병력을 증강했고 1920년 5월 대한독립군은 국민회군 및 군무도독부와 연합해서 대한북로독군부를 편성하고 행정과 군무를 총괄하는 독군부장(총사령관)의 지위는 최진동이 맡고, 홍범도는 북로사령부장을 맡아 약 1000명의 독립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대한북로독군부가 화룡현 봉오동에 근거지를 설치하고 있을 때, 국내에 진입한 신민단 독립군 소부대를 추격해 온 일본군 1개 대대가 두만강을 건너 봉오동까지 진입하자 홍범도는 주민을 철수시키고 독립군을 매복시켰다가, 1920년 6월 7일 봉오동 분지에 들어온 일본군 1개 대대를 포위 공격하여 157명을 사살하고 200명을 부상시켰고 독립군의 손실은 전사 4명, 중상 1명으로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봉오동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1920년 10월 일본군 제19사단을 주력으로 2만5000명을 동원하여 간도를 침공하여 아즈마 지대는 이도구와 삼도구를 포위하고 공격 작전을 개시했다.

일본군의 공격에 대처하여 이도구에 모인 대한독립군・국민회군・의군부・한민회군・광복단・의민단・신민단 등의 독립군 부대들은 홍범도를 사령관으로 한 독립군 병력 1400명의 연합부대를 편성했고 삼도구 청산리에 주둔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독립군 600여 명도 전투 준비를 마쳤다.

청산리의 첫 전투는 백운평에서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대승리를 쟁취했고 특히 이범석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 연성대는 큰 전공을 세웠다. 두 번째 전투인 ‘완루구 전투’에서는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포위해 들어오는 일본군 아즈마 지대 본대 수백 명을 사살했다.

‘천수평 전투’에서 북로군정서가 일본군 기병대 전초 중대 120명을 섬멸한 세 번째 전투에 뒤이어 어랑촌 서남단 고지에서 북로군정서군이 일본군에 포위되어 혈전을 전개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을 공격하여 독립군 2000여 명과 일본군 아즈마 지대 5000여 명이 혈전을 벌여 일본군에게 승리를 거둔 청산리의 네 번째 전투인 ‘어랑촌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뒀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거듭한 일본군이 계속해서 추격해 오자 독립군 조직을 총망라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부총재에 선임된 홍범도는 그 뒤 간도 지방의 김좌진ㆍ최진동 부대와 함께 러시아로 이동하여 흑룡강 자유시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고 러시아군과 교섭하여 협조를 얻었다. 그러나 러시아 공산당의 배반으로 무장해제된 뒤 많은 단원이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는 등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겪게 된다.

자유시 참변 이후 한인 무장세력은 러시아 공산당의 강력한 통제로 인하여 활동에 많은 제약이 가해졌고, 이로 인해 그도 항일 무장투쟁의 꿈을 간직한 채 이만, 연해주 등의 집단농장, 협동농장 등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농민층의 생활 향상과 한인 동포들의 권익 보호에 힘썼다.

그 후 1937년 9월 스탈린에 의한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따라 연해주를 떠나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하여 극장 수위 등으로 생활하던 중 1943년 10월 25일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한국민족독립운동 사상 영원불멸의 전설적 영웅으로 높이 평가된 홍범도 장군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고 2021년 광복절 카자흐스탄에서 유해가 봉환되어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 묘역에 안장됐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나무위키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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