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6월일] 비운의 군주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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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6월일] 비운의 군주 ‘광해군’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1.06.04 13: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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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본문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본문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575년 6월 4일(음력 4월 26일)은 조선의 15대 국왕이면서 오늘날까지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군주, 광해군이 태어난 날이다.

임진왜란 때 피난을 떠난 부왕 선조 대신 의병을 이끌고 국사를 보살피는 등의 활약으로 백성들의 민심을 얻었다.

즉위 후에는 막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실리를 우선시하는 중립외교 노선을 취했다.

그 외에도 전후 복구와 대동법의 실시 같은 개혁정책을 펼쳤으나 이 과정에서 많은 옥사가 일어났다.

여기에 영창대군이 태어나며 왕으로서의 정통성에 위협을 겪자,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왕후를 유폐한 일을 계기로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된다.

▲ 세자 책봉 전 초기 생애

광해군은 선조와 김희철의 딸 공빈 김씨의 서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위로는 친형 임해군 이진이 있었다.

어려서 생모 공빈 김씨를 여의고 부왕의 냉대 속에 자랐다. 외할아버지인 김희철마저 임진왜란 중에 전사하면서 그가 기댈 곳은 없었다.

다만 선조에게 적자가 없는 데다, 서장남인 임해군이 포악하고 인망이 없어 서차남이었던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될 수 있었다.

야사에 따르면, 선조가 아들들을 불러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더니, 다른 왕자들은 각기 다른 대답을 했으나 광해군은 소금이라 대답해 세자로 책봉되었다고 한다.

▲ 임진왜란에서의 활약

선조는 의인왕후 박씨가 아이를 갖지 못하자 어쩔 수 없이 서출 왕자들 사이에서 세자를 정해야 했으며, 총애하는 인빈 김씨의 소생 신성군을 점찍고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발발 후 신성군이 피난길에 죽고 분조해야 할 상황에 부닥치자 선조는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광해군은 전쟁 중에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된 뒤 선조가 피난 가고 없는 궁을 지키면서 전란 수습을 했다.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는 한편, 민심을 살피고 군량미를 모아 민중들의 신망과 지지를 받기도 했다.

부왕의 정비인 의인왕후의 양자가 되어 세자로서 위치를 표면상 굳히게 됐으나 부왕 선조는 그런 세자 광해군을 오히려 경계하며 심하게 견제했다.

실제로 1598년 임진왜란이 종전 후 왕실에서는 신성군, 정원군 등을 호성공신에 추가 수록한 반면 광해군에 대한 포상은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

▲ 통치 기간의 업적

즉위 직후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서적 간행에 힘썼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했으며, 허준의 《동의보감》도 이 시기에 나왔다.

대외적으로는 광해군은 1618년 만주에서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을 건국하자 북방의 성과 병기를 수리하고 군사를 양성하는 등 국경 방비에 힘썼다.

619년 후금의 누르하치가 심양 지방을 공격하여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에서 원군을 요청하자 강홍립과 김경서를 보내어 명군을 원조한다.

그러나 명나라군이 사르후, 상간하다, 아부달리에서 잇달아 패주하고 조선 측도 큰 피해를 입자, 광해군은 후금에 파병을 해명하며 침략을 모면하는 중립외교를 취했다.

오늘날 이 중립외교는 전란을 예방한 현명한 처신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친명 성향의 서인세력들을 반발하게 만든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선혜청을 두어 쌀로 조세를 내도록 하는 대동법을 시행했으나 두 번이나 폐지를 시도한 것으로 보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 인조반정

세자 시절부터 입지의 불안을 느낀 광해군에게 가장 거슬리는 존재는 계모 인목왕후와 이복동생 영창대군이다.

계축옥사가 발생하자 그는 1613년 영창대군을 추대하여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했다.

1614년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얼마 후 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죽였다. 1615년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동생인 능창군까지 폐서인하여 교동에 안치했다.

영창대군의 생모 인목왕후는 김개시, 이이첨 등의 계략에 의해 1618년 폐서인으로 강등당하고 서궁에 유폐당하면서 인조반정의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1623년 3월 14일 새벽, 반정군은 궁으로 진입했고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된 후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다가, 1641년 67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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