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 5월 5일] 의병장 ‘안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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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 5월 5일] 의병장 ‘안규홍’
  • 여운민 기자
  • 승인 2021.05.05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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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여운민 기자] 안규홍(1879년 4월 10일 ~ 1911년 5월 5일)은 대한제국 말기 정미의병 당시 활약했던 의병장이다. 본관은 죽산, 별명은 안계홍·안담살이·안진사, 자는 제원, 호는 담산 이다. 전라남도 보성 출신인 그는 어렸을 때 매우 가난해 머슴살이(담살이)로 편모를 봉양했다. 오늘은 그가 사망한 날이다.

의병장 안규홍
의병장 안규홍

▲ 의병 활동

일본의 내정 간섭이 점차 심화되던 1907년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의병을 일으켜 응징하기 위해 담살이 동지들과 모의하는 한편, 주인에게 거사할 자금으로 전곡포백을 요구하고, 보성의 우국지사인 참봉 안극의 집에 침입해 무기와 가재를 몰수하고 점차 동지를 규합했으나, 크게 빛을 발하지 못했다.

이후 함경도 출신, 순천 부근에서 활동하던 강성인 부대에 투신해 부장으로 임명됐다.

그러나 강성인이 양민을 살해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만행을 하자 1908년 그를 군율대로 총살하여 군기를 확립하고 의병대장으로 추대됐다.

그의 부대에는 염재보·송기휴·이관회·송경회 등이 있었다. 이들은 전라남도 지역의 시장을 돌면서 인원을 보강했고, 그 과정에서 병법에 밝은 오주일이 합세했다. 보성 동소산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조직을 정비했다.

1908년 2월 일본군이 '보성폭도토벌대'를 구성하여 보성·벌교·순천 등지에 포진해 의병대를 공격하자, 매복하고 있다가 보성 헌병분견소의 헌병을 기습해 2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뒤 적의 무기와 서류 등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여 대원산에 거점을 두고 활동했다. 이것이 ‘파청대첩’이다. 그해 6월 보성군 내에 있으면서 부하를 시켜서 일본군이나 일본군 통역관을 살해하기도 하고, 헌병·경찰 연합토벌대가 습격해오자 정면으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같은해 8월 장경선을 참모로 삼아 병력을 증강하고 진산에 집결했다. 이때 헌병분견대 병력이 인근 수비대 경찰과 연합토벌대를 만들어 포위해오자, 의병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 직접 천보총으로 적의 선봉을 쓰러뜨렸다.

1909년 1월중에 밀정이 있어 아군의 정보가 새나갔지만 이를 모른 체하고 적의 행군요소에 복병하고 대기하다가 세 방면으로 공격하여 적을 무찔렀다. 3월에는 원봉에 주둔하던 적을 기습했다. 이때 와타나베 부대와 2개월에 걸쳐 10여 차례 접전했으며, 와타나베가 한국인 첩자를 보냈으나 이를 역이용하여 와타나베를 처형했다.

이것이 ‘진산대첩’과 ‘원봉대첩’으로서 파청대첩과 더불어 보성의진의 3대 대첩이다.

보성전투에서는 전과를 거두었지만 유격장 안택환과 서기 임준현이 전사해 장흥 전세가 불리해 백사정로 후퇴했다. 이때 일본의 의병·혈족을 통한 회유·협박 및 기만책으로 점차 의진 이탈자가 늘자, 1909년 7월 일단 의진을 해산했다.

같은 해 9월 25일 귀향하던 중 보성군 봉덕면 법화촌 에서 부하 염재보·정기찬과 함께 토미이시 부대에 붙잡혔다. 광주에 수감되었다가 대구로 옮겨진 뒤 1911년 옥사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위키 백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다음 백과 / 온라인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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