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4월20일]세계를 전쟁의 포화속으로 몰아넣은 ‘아돌프 히틀러‘
상태바
[역사속의 오늘-4월20일]세계를 전쟁의 포화속으로 몰아넣은 ‘아돌프 히틀러‘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4.20 10: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889년 오늘 민족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당수이자 나치 독일의 총통을 지낸 아돌프 히틀러가 출생했다.

그는 독일 민족 생존권 수립 정책을 주장하며 자를란트의 영유권 회복과 오스트리아 합병,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및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촉발하였고, 아리아 인 순혈주의를 주장하여 수많은 유대인과 집시 등을 학살했다.

모든 타협을 배척하고 최후까지 전쟁을 수행했으나 결국 패배한 그는 1945년 4월 30일 엽합군이 베를린을 포위하자 총통 벙커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1933년 독일 총리인 히틀러 [출처=게티이미지 코리아]
1933년 독일 총리인 히틀러 [출처=게티이미지 코리아]

민족사회 주의자 독일 노동당(나치당)

어릴 적 화가가 꿈이었던 아돌프 히틀러는 하급 세무 관리인 알로이스 히틀러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일부 학자들은 히틀러의 난폭한 성격과 행동의 원인이 무례하고 흉포한 아버지의 영향에서 찾기도 한다

20세기 초, 독일인과 체코슬로바키아인들 사이에 민족적 갈등이 고조될 때 히틀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와 오스트리아 내 독일인 거주 지역을 독일에 합병을 주장한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게오르크 폰 쇠네러의 독일 민족지상주의와 반 가톨릭 교회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히틀러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에 자원입대하여 2개의 철십자 훈장을 받았으며 1918년 독일의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독일의 11월 혁명과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격렬한 반대 입장에서 우익정당인 '독일 노동당'에 가입한다. 

열렬한 민족주의 이념과 반민주, 반자본, 반공산, 반유대의 노선을 표방한 ‘독일 노동당’은 얼마 후 '민족사회 주의자 독일 노동당'이라고 명칭으로 바꾸고 '나치(Nazi)'라고 불렸다.

나치의 중심에 선 히틀러는 군대 동료들을 입당시키고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던 당의 노선을 친 대중적으로 바꾸고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당을 본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융합한 민족 사회주의 노선을 띠어갔다.

종전 후 들어선 바이마르 정부의 실정과 히틀러의 뛰어난 연설 실력으로 군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된 나치당은 1920년 뮌헨에서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와 독일의 영토확장 내용이 포함된 25개 조의 당 강령을 발표하였고 1923년 11월에는 바이에른주의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뮌헨 폭동' 또는 '맥주홀 폭동'을 시도한다. 그러나 협력을 약속한 바이에른 정부의 배신으로 폭동은 실패하고 히틀러는 체포되어 5년 형을 선고받고 란츠베르크 감옥에 9개월간 수감되었다.

그러나 재판에서 히틀러는 봉기의 의도인 베르사유 조약의 부당함과 유대인의 음모를 뚜렷이 표명했다. 봉기의 유일한 지도자로 부각돼 대중의 인기가 높아진 그는 감옥 안에서 그의 정치적 사상이 담긴 ‘나의 투쟁(Mein Kamphf)’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는 이 책에서 제1차 세계대전, 독일 패망에 대한 배신감 등을 피력했으며 아리아인 특히 독일인을 '천재' 민족으로, 유대인을 '기생 동물'로 규정하면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배척했으며 전쟁과 무력이야말로 강자가 행사할 수 있는 적절한 수단이라고 서술했다.

▲독일 총통

1925년부터 1929년 사이 독일은 경제적 부흥기를 맞아 대규모의 공공 토목사업이 진행되어 한때 세계 제2의 산업국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대공황의 시작으로 독일 시민들의 불만이 쌓이자 히틀러는 군중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정부의 무능함을 지적하고 시민들의 답답한 심정을 대변, 그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어 1930년 나치당은 제2당으로 급성장한다.

1933년 수상으로 임명된 그는 군 수뇌부와 경제계 거물들까지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그해 2월 27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이용하여 공산당을 탄압하고, 대대적인 정적 제거 작업에 착수했다. 이런 상황에서 실시된 총선에서 나치당은 43.9%의 지지를 얻었고, 7월 무렵 히틀러는 보수파와 군부를 장악하여 나치당에 의한 일당독재체제를 확립했다.

1934년 8월 2일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히틀러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자신이 총통 겸 총서기로 취임하여 전쟁 배상금과 대공황으로 휘청거리고 있던 독일의 경제 회복에 총력을 기울이고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고속도로인 ‘아우토반’ 등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였다. 

자급자족 정책의 확립, 실업자의 감소, 사회보장정책의 실시, 특히 신분제적 특권의 소멸과 각종 구습 및 제도의 폐지 등의 혁신에 성공함으로써 히틀러의 인기는 점점 올라가 독일 국민은 그에게 열광했으나 독재정치가 진행되어 국민 생활은 획일화되었고, 언론·집회의 자유를 비롯한 각종 자유가 사라졌으며, 히틀러의 반대파는 강제수용소에 수용되거나 살해되었다.

▲전쟁의 서막

1933년 10월 국제연맹을 탈퇴한 독일은 1934년 1월 폴란드와의 불가침 조약으로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났고, 1935년 1월 자르 지방의 국민투표에서 대승하여 자르의 영유권을 회복하는 등 히틀러의 외교적 성과는 눈부셨다.

1935년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의 군사 제한 조항을 폐기하고 징병제를 부활시켰다. 그해  6월 영국-독일 해군 협정을 체결해 해군력을 증강했다. 1936년 3월에는 로카르노 조약을 파기하고 라인란트 지역의 재무장을 강행하여 프랑스의 안보체제에 위협을 가했다.

이런 독일의 재무장을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 주변국들은 지지 또는 대공황의 어려움으로 침묵했고 1937년 히틀러는 군부와 정부의 수뇌들을 모아 은밀히 전쟁 의지를 표명했다. 그는 1938년 3월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같은 해 9월 체코슬로바키아에 관한 뮌헨 협정으로 그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렀고, '불세출의 영웅', '일찍이 없었던 위인'으로 존경받았다.

러시아와 불가침 조약을 맺어 러시아의 개입을 미연에 차단한 히틀러는 1939년 9월 1일 선전포고도 없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의 대응은 너무 늦었으며 미국은 국내 여론 때문에 고립주의를 표명하며 개입을 삼가고 있었다.

히틀러는 그사이 공습 및 기계화 부대의 신속한 기동력이 결합한 ‘전격전’이라는 전법으로 덴마크와 노르웨이, 벨기에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정복하고 프랑스마저 항복했다. 1940년 말까지 히틀러는 서부 유럽과 북부 유럽 전체(중립국인 스페인과 포르투갈, 스위스와 스웨덴은 제외)를 점령하였고 유대인 약 600만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독일은 영국과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군의 파상적인 공세와 러시아 스탈린그라드와 북아프리카 전선의 패배 그리고 1944년 그를 추종하던 주요 장군들과 보수 제정파 정치가들의 암살 미수 사건으로 히틀러의 정신이상으로 인한 전선의 혼란 등 독일의 패배는 만회할 길이 없었다.

서부와 남부 전선에서 연합군이 베를린 인근까지 공격해왔고, 동쪽에서 소련군은 베를린 외곽 가까이에 진격해오자 1945년 4월 30일 그는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애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다음 날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에 자살했다.

히틀러의 점령정책은 매우 가혹하여 반나치 저항운동이 전 유럽에 걸쳐 전개되었으나 독일 내에서는 히틀러의 이민족 억압 및 착취 정책에 대한 비난은 거의 없었으며 오히려 독일의 주요 지배 계급은 전쟁 말기까지 히틀러의 전쟁 수행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