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4월 13일]‘목포의 눈물’을 작곡한 '손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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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4월 13일]‘목포의 눈물’을 작곡한 '손목인'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4.1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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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913년 오늘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등 가요 1천여 곡, 뮤지컬 50여 곡과 영화음악 70여 편을 작곡한 ‘손목인’이 출생했다.

1964년 한국음악저작권협회와 1989년 한국가요작가협회를 설립하여 초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음악인들의 권익 보호에 앞장선 그는 1999년 도쿄 방문 중에 사망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군국가요를 작곡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한 이력으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중 음악인 부문에 포함됐다.

▲히트곡 제조기

1913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한의사인 아버지 손세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본명은 손득렬이다. 그는 본명 외에도 작곡 활동은 양상포라는 예명으로, 손 안드레 임원이라는 예명으로 가수 활동을 하기도 했다. 

부유한 유년 시절을 지내다 서울로 올라와 재동 공립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공업 전수학교에 입학 후 중동학교로 편입했고, 이 시절 기독교청년회(YMCA)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서양음악을 접한 후 음악가가 되기로 한다.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데이코쿠(帝國)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 오케(Okeh) 레코드사 사장 이철을 소개받아 첫 작품인 ‘아침 전주곡’과 ‘스케팅 시대’를 1934년 1월에 발매하면서 순회공연 및 대중가요 작곡을 시작했다.

1934년 신인 가수 고복수가 부른 ‘타향살이’와 ‘이원 애곡’을 작곡해 큰 주목을 받았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의 향수를 달래는 노래인 ‘타향살이’는 1930년대 후반 가요 황금기의 시작을 알린 곡이다. 이 노래로 고복수가 일약 스타가 되자 그는 고복수를 위해 ‘사막의 한’ㆍ‘짝사랑’ㆍ‘휘파람’ㆍ‘꿈길 천리’ㆍ‘항구야 잘 있거라’ 등을 작곡했다.

1935년 그는 우리 가요사의 기념비적인 노래 ‘목포의 눈물’을 발표한다. 이난영이 노래한 이 곡은 오케레코드사가 조선일보사와 제휴해 전국 6대 도시의 애향가 가사를 공모해서 당선작에 곡을 붙인 것으로,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5만 매가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그 외에도 ‘해조곡’ㆍ‘청노새 탄식’ㆍ‘뗏목 이천리’ㆍ‘아빠의 청춘’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으며 이난영과 고복수, 남인수, 장세정, 김정구, 박단마 등이 그가 작곡한 노래를 불러 인기를 끌었다. 

광복 이후 조선 음악가협회 위원으로, 1946년에는 조선 음악 구락부 악단을 재조직하여 이끄는 등 다수의 악단에 참가해 활동했고, 1947년 서울 중앙방송국 경음악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아리랑 악극단, 무궁화 악극단, 현대 가극단, 백조 가극단 등의 공연에 참여했고 부산 피난 중에 부기 우기 양식의 ‘슈 샤인 보이’를 작곡했다. 1952년 일본으로 밀항하여 일본의 영화 음악계에서 활동하면서 작곡한 ‘카스바의 여인’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1957년 귀국해 ‘사랑의 기로’ㆍ‘지옥화’ 등 영화음악을 작곡했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발한 창작 활동을 펼쳤으며 1960년 한국 영화음악 작곡가협회 부회장과 1964년 한국음악저작권협회의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1987년 손목인 음악 센터를 설립하고 동료 작곡가 길옥윤ㆍ박시춘ㆍ박춘석ㆍ반야월 등과 친밀한 교유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 작곡계를 이끌었으며 한국음악저작권협회와 한국가요작가협회(1989)를 만들어 음악인들의 권익 보호에 앞장섰다.

1999년 자신이 작곡한 곡의 저작권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도쿄를 방문했다가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갑자기 숨졌으며,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한국 대중가요의 선구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긴 공으로 1987년 화관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친일 반민족 행위

그는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군국주의 정책에 부합하는 친일 가요를 작곡하기 시작하여 ‘이천오백만 감격’ㆍ‘참사랑’ㆍ‘봄날의 화신’ㆍ‘그대와 나’ㆍ‘총후의 기원’ 등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노래를 남겼다.

또한 조선악극단, 오케싱잉, 신향 악극단, 제일 악극대 등의 공연단체에서 활동했으며 1943년 부민관에서 제일 악극대가 공연한 ‘아세아 교향악’ㆍ‘고향’ㆍ‘간첩은 아직 살아있다.’ 등을 총지휘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원됐다. 

이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중 음악인 부문에 포함되었고, 시민단체가 그의 기념사업 중지를 요구하기도 했다.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손목인을 김해송과 함께 ‘일제 강점하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명시된 친일 반민족 행위 결정 심의 대상자 명단에 올렸지만, 작곡가가 갖고 있던 당시의 사회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사실이 인정되어 기각했다.

 

★손목인의 출생일에 대해 4월 13일과 4월 23일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는 위키백과에서 4월 13일로 표기하고 있어 이에 따랐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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