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4월2일]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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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4월2일]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출생
  • 김상옥 기자
  • 승인 2021.04.02 17: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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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
안데르센

[미디어인천신문 김상옥 기자] 1805년 4월 2일은 세계적인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 태어난 날이다.

인어공주, 성냥팔이 소녀 등 많은 동화와 시, 소설을 남긴 그는 오늘날 아동문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안데르센의 시와 이야기는 15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됐고, 작품들은 영화, 연극, 발레, 애니메이션이 탄생하는 데 필요한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

생전에 그의 초상화를 담은 기념우표가 만들어지는가 하면, 노년에는 고향 오덴세의 명예 시민으로 받들어졌다.

2005년 4월 2일에 안데르센 탄생 200주년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 웹사이트가 개설되기도 했다.

▲ 출생과 어린 시절

안데르센은 덴마크의 오덴세에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이라는 이름은 안데르센이 루터교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 대부모가 붙여준 이름이다.

안데르센의 집안은 할머니가 병원에서 청소 노동자로 일할 정도로 가난했고, 이는 그의 성장 과정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독실한 루터교 신자인 어머니는 안데르센에게 예수를 공경하는 순수한 개신교 신앙을 심어줬다.

아버지는 인형극과 독서를 통해 어린 그에게 옛날 이야기와 '아라비안 나이트'를 자주 들려 주며 상상력과 교양의 원천이 되는 존재였다.

어린시절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가장의 자리가 비게 되자 안데르센은 어린나이에 공장에서 일하고, 어머니는 빨래를 대신해주는 일을 했다.

▲ 작가가 되기까지

1819년에 안데르센은 연극배우의 꿈을 품고 수도인 코펜하겐으로 갔으나, 변성기 이후 목소리가 탁해지면서 꿈을 접어야 했다.

더구나 가난 때문에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해서 문법과 맞춤법이 엉망인 그의 연극대본은 극단주에 의해 반송됐고,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극심한 마음의 고통에 시달렸다.

다행히 그는 작가로서의 재능을 알아본 덴마크 의회 의원인 요나스 콜린의 후원으로 라틴어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데르센이 시를 쓰는 것을 싫어하는 교장과의 갈등 때문에, 5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1828년 코펜하겐 대학교에 입학했다.

▲ 작품 세계와 평가

몇 편의 희곡, 소설을 쓰면서 작가로서의 재능을 드러낸 안데르센은 '즉흥시인'(1834년작)으로 문학계의 호평을 받았다.

동화 저작에 들어간 것은 1835년부터이며, 어른들도 읽을 정도로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다.

하지만 일부 문학비평가들은 "즉흥시인을 쓸 정도로 뛰어난 작가가 어린이를 속이는 이야기나 쓴다"는 가혹한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의 문학 세계는 안데르센 본인이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이라는 것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가령 성냥팔이 소녀는 가난하게 자라서 구걸까지 해야 했던 안데르센의 어머니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또한 눈의 여왕은 어렸을 때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아버지가 신경쇠약으로 죽자, 이를 '눈의 여왕'이 데려가는 것으로 생각한 어린시절의 기억이 소재가 됐다.

▲ 개인사

안데르센은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대부분의 생애를 해외여행으로 보냈다.

그가 가장 즐겨 체류하던 나라는 독일과 이탈리아였으며, 현지의 시인·문학자·미술가는 물론 귀족과 정치가들과도 어울렸다.

그에게 가장 깊은 정신적 영향을 준 것은 ‘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라 불리는 제니 린더와의 교제였다.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은 연애까지는 진전되지 않은 채 안데르센으로 하여금 깊은 체념에 빠지게 만들었다.

1870년대 초부터 건강이 나빠진 안데르센은 1875년 8월 친구인 멜피얼가의 별장에서 죽었다. 그의 장례일에는 덴마크 전국민이 복상했으며, 국왕·왕비도 장례에 참석했다고 한다.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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