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4월 6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성철’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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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4월 6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성철’스님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4.06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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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912년 오늘(음력 2월 19일) 오로지 구도에만 몰입하고 평생 철저한 수행으로 일관한 승려 성철이 출생했다.

그는 평소 제자들에게 잠을 적게 잘 것, 말하지 말 것, 책을 보지 말 것, 간식을 먹지 말 것, 돌아다니지 말 것 등을 권하였고, 성철 자신도 평생을 작은 암자에서 생활하며 소금기 없는 음식을 먹고 발우 하나 옷 한 벌의 전형적인 수도자의 삶을 살았다.

조계종 종정을 지내며 선과 교는 중도사상으로 통일되어 있다고 말하였고, 고승 지눌의 돈오점수를 비판하고 그에 맞서서 돈오돈수를 주장하여 불교 세간에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출가

그는 1912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부농인 아버지 이상언의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집안의 기대와 귀염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3살 때 글을 읽고 5살 때 시를 지을 만큼 자질이 뛰어났으며, 열 살 무렵에 사서삼경 등 유서를 읽고 모든 경서를 독파하여 신동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속명은 이영주이며 산청 단성 공립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중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몸이 약해 진학하지 않고 대원사에서 요양 중에 불가에 입도,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에 들어가 조실 하동산 스님에게 사미계를 받고 1936년 승려가 되었다. 법명은 '성철(性徹)'.

그에게 계를 준 동산 스님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으로 당시 한국 불교계의 최고 고승인 용성 스님의 제자였던 이유로 '용성 - 동산 - 성철'이라는 한국 선종의 대표적 흐름이 생겨난다.

스님은 속세와의 인연을 끊기 위해 불가의 구도에만 전념했고 동화사 금당에서 동안거 중 견성(마음 닦는 공부를 하여 깨달음을 얻게 되는 체험의 경지)하고, 1937년부터 1964년까지 금강산 마하연, 송광사, 파계사 성전암, 봉암사, 묘관음사, 문수암 천제굴 등에서 수십 회 안거를 지냈다.

특히 1955년 9월부터 1964년까지 행한 “10년 동구불출”은 대구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에 철조망을 두르고 두문불출하며 외부의 출입도 막고 일본의 남전대장경은 물론 영문 잡지와 다양한 분야의 신종 서적을 섭렵하며 거의 모든 시간을 책을 읽으며 보냈다.

1965년 대학생 불교연합회 회원들이 김용사를 방문하자 3000배를 시키고 “불교의 근본 사상인  이변 중도로부터 시작하여 불교에서 본 우주의 실상, 우리가 이 실상과 하나가 될 가능성, 그 방법론 등”을 현대학문의 방증을 들어 설법했다.

1966년에는 참선 정진을 중심으로 20일간 반야심경을 시작으로 육조단경, 금강경, 신심명, 증도가 등의 경론과 중도 법문을 한 최초의 대중 설법인 ‘운달산 법회’가 열린다. 이후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추대되어 불교의 중심 사상인 중도사상을 체계화한 ‘백일법문’을 설했다. 

▲돈오돈수

1981년 조계종 제7대 종정으로 추대되어 추대식에 참여하는 대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를 발표한다. 다만 이 말은 성철의 창작이 아니고, 중국 송나라 때 발간된 불교서 ‘오등 회원’에 나오는 중국 승려 청원 유신 선사가 남긴 말이다.

그러나 이 법어는 1980년 5ㆍ18 민주화운동과 10ㆍ27 법난이란 큰 사건을 겪은 당시 불교계의 위기의식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현실도피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승가의 수행에서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하여, 깨달음이란 바로 견성(見性)이며 구경각(究竟覺)임을 논증하려고 노력했다.

돈오돈수는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는다’는 뜻으로 성철은 자신의 저서 ‘선문정로(禪門正路)’에서 남종선(불교 선종의 일파)의 조사 육조 혜능의 사상은 돈오돈수이며 지금까지 한국 선종의 수행 전통으로 여겨온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 단박에 깨치고 점차로 닦는다)는 육조 혜능의 종지를 제대로 잇지 못한 것이라 했다.

그는 1976년 ‘한국불교의 법맥’을 출간하여 조계종의 정체성을 확립했고, ①‘선문정로’ ②‘본지풍광’ ③‘돈오입도요문돈’ ④‘신심명ㆍ증도가’ ⑤‘자기를 바로 봅시다’ ⑥‘돈황본 육조단경’ ⑦‘영원한 자유’ ⑧‘백일법문’ ⑨‘선문정로 평석’ 등의 저술을 남겼으며, 또 그의 지도하에 선림고서총서 전 37권을 번역ㆍ발간했다.

저서를 통해 ⓐ중도로 선과 교를 회통 ⓑ초기 경전 강조 ⓒ대승비불설 논파 ⓓ참선의 대원칙 ⓔ대중교화 ⓕ자비 등에 관한 그의 사상과 주장을 나타냈다. 

세속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다가 1993년 11월 10일 영결식 및 다비식을 봉행하여 11월 12일 100 여과에 이르는 사리를 수습하여 1998년 11월 해인사 운양대에 사리탑을 봉안했다. 제자들은 백련 불교문화재단에서 퇴옹성철 대종사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그의 유업을 계승하고 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나무위키 /백련불교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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