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오늘-3월30일]트럭 1대로 한진그룹을 키워낸... ‘조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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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3월30일]트럭 1대로 한진그룹을 키워낸... ‘조중훈’
  • 김철한 기자
  • 승인 2021.03.30 1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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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인천신문 김철한기자]1920년 오늘(음력 2월 11일) 광복 후 트럭 1대로 인천에서 한진상사를 창업해 시작한 화물 운송사업을 기반으로 한진그룹을 운송 및 물류 전문 재벌로 키운 조중훈 회장이 출생했다. 

그는 6.25 전쟁 때 차량과 장비들이 군용으로 징발되어 잠시 어려움을 겪었으나 1956년 주한 미 8군과 체결한 군수물자 수송 계약과 베트남 전쟁 당시 파병되는 미군과 체결한 군수물자 수송 계약을 바탕으로 한진그룹을 운송 및 물류 전문 재벌로 키웠다.

1999년 4월, 상하이 KAL기 추락사고에 대한 책임으로 대한항공 대표이사 회장직을 아들 조양호에게 넘겼으며, 2002년 11월 사재 1천억 원을 사회에 환원하고 사망했다.

조중훈 회장[출처=한진칼 홈페이지]

▲물류 산업의 선구자 

그는 1920년 서울에서 직물 도매상을 하던 아버지 조명희 슬하의 4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수학, 과학, 공작 활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휘문 고등 보통 학교 재학 중 아버지가 운영하던 직물점이 부도나자 자퇴한 후, 진해 고등 해원 양성소를 수료했다.

이후 일본 고베의 후지무라 조선소에서 2등 기관사 자격증을 취득해 수송선을 타고 홍콩, 마카오, 필리핀 등지를 다녔으며, 이 과정에서 유대인 상인들과 중국인 상인들을 만나며 상업 철학을 깨우쳤다.

1945년 11월 서울-인천을 오가는 화물량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 트럭 1대로 화물사업을 시작했다. 영등포와 인천 간 카바이드 총대리점을 맡아 충청도와 강원도 일대로 사업영역을 확장하고 1947년 트럭 15대를 갖추고 경기도 일대의 화물 수송업 면허를 따냈다.

한진상사는 미군 운송권을 거의 독점했는데 1960년 한 해 계약액만 220만 달러, 용차를 포함한 가용차량이 500대에 이르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1961년 8월 주한미군 통근버스 20대를 매입해 서울-인천 구간에서 한국 최초의 '좌석버스' 사업을 시작한 것이 한진 고속의 시초가 되었다. 

그는 베트남 전쟁 덕을 크게 보았는데 당시 미군과 5년간 1억 5,000만 달러의 하역 및 수송계약을 체결하였고 그 기반으로 1967년에 자본금 2억 원으로 대진 해운을 창설하고 그해 9월 삼성물산의 동양 화재 해상을 인수했다.

계속된 사세 확장으로 1969년에 당시 공기업인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대한항공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서울-오사카-타이베이-홍콩-사이공-방콕을 연결하는 동남아시아 최장 노선을 개설했다. 1977년 대진 해운을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인 한진해운으로 변경하고 1987년 부실 회사인 대한 선주를 인수ㆍ 합병해 국내 굴지의 해운회사로 키웠다.

또한, 1989년에 법정관리 중인 대한조선 공사를 인수하면서 한국공항, 한진관광, 한일개발, 대한 선주, 대한조선 공사, 한진중공업 등 21개 회사를 한진그룹으로 키워낸 그는 재벌기업의 무분별한 이른바 문어발식 확장을 지양하고 수송 외길을 고집했다.

▲민간 외교가

그는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으로 1988 서울 올림픽 유치에 앞장섰으며, 한국항공대학교, 인하 공대 등을 인수해 정석학원을 설립했으며 에어버스 A300 여객기의 성공적인 운용 및 에어버스의 외국 판로 개척을 열게 한 공로로 199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 중 2등급인 그랑도피시에를 받았다.

1970년 이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한진그룹 회장, 제1대 대한관광협회 중앙회 회장, 한·프랑스 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 재일 교포 모국방문 추진위원회 이사, 한국항공대학 이사장, 동양 항공사 협회(OAA) 의장, 한국 유네스코 협회 연맹 초대 회장 등을 그리고 1988년 이후에는 국제 민간 경제협의회 부회장, 한ㆍ불 최고 경영자 서클 명예회장, 안중근 의사 사업추진위원회 고문, 전국 경제인연합회 고문, 제7ㆍ8기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서울지부 부의장 등을 역임했다.

1999년 4월 22일 대한항공 대표이사 회장 자리를 장남 조양호에게 물려줬으며 2002년 11월 17일 인하대 부속병원에서 8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 되었다.

그는 항공기 리베이트 탈세 혐의와 계열사 부당 지원 그리고 변칙 증여 등 많은 논란을 낳았으며, 그의 사후에는 큰 손녀에 의한 대한항공 086편 이륙 지연 사건과 또 다른 손녀의 갑질 행태 그리고 장손 조원태 회장의 2000년 중반 뺑소니 사건과 2005년 70대 여성 폭행 사건이 재조명되고, 맏며느리(조양호의 부인)의 각종 갑질 증언 등의 문제가 언론에 알려지면서 2018년 한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기업이 되었다.

 

*출처: 다음 백과 /두산 백과 /온라인 커뮤니티 /위키백과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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